[사설] 성도로서 마땅한 사랑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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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로서 마땅한 사랑의 삶

고린도전서 13장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주로 달콤한 사랑, 설레는 사랑, 목마른 사랑, 못 잊을 사랑에만 익숙한 우리로선 머쓱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장엄한 사랑의 찬가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이 가리키는 사랑은 물론 즐기는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고 성자들이 흔히 실천하는 나누는 사랑만도 아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절)는 말씀을 보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사랑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세계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달콤한 사랑보다 귀하고, 훌륭한 이들이 본을 보인 나누는 사랑보다 엄중한 사랑이란 무엇이겠는가? 그건 바로 배려의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4, 5절에 소개된, 이처럼 다양한 사랑의 밑절미는 바로 배려이기 때문이다.

긴말을 요약하면, 성경이 가리키는 사랑은 즐기는 것도 아니요 나누는 것도 아니요, 나 아닌 남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그 사랑을 흉내 낼 수 없다. 결국 그 사랑의 본체는 우리를 배려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하신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마지막 13절 말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도 좀 어렵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좋기로서니, 설마 믿음보다 좋을 리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목에 걸리기 때문이다.

성도에게 있어 믿음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는 건 진리요 상식이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자의 사랑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우리에겐 믿음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하고 소망도 필요하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그 놀라운 사랑의 본체도 알 길이 없다. 또한 우리에게 그 사랑(예수 그리스도)이 없으면, 주님의 약속을 붙잡는 소망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그중에서 제일은 믿음도 소망도 아닌 사랑이란 말인가? 사랑은 오늘 내게 주어진 책무요, 소명이요, 역할이요, 내 삶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이미 받아들인 과거라면 사랑은 현재를 풀어내는 실타래와 같고 소망은 미래를 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오늘을 보시고 판단하신다.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거나, 진노하신다면, 그건 오직 오늘 지금 내 모습과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언행에 달린 것이다. ‘과거의 악인이 지금 돌이켜 의롭게 행하면 반드시 살거니와 과거의 의인이 돌이켜 지금 가증한 일을 행한다면 반드시 죽는다.’는 게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겔 18:21-24).

다른 말로 하면, 과거의 믿음 생활 여부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믿음 생활 여부가 결정적이라는 말씀이다. 흔한 말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것은 미래는 인간의 영역이 아님을 웅변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믿거나 내일로 미루는 것만큼 어리석고 못난 짓은 없다. 우리가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일 수도 있기 때문이요, 그러기에 오늘만큼 소중한 내 인생의 기회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성도의 마땅한 삶은 사랑의 삶이다. 그건 배려의 삶, 곧 십자가의 삶이다. 성도가 형통하고 잘 사는 건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렇지 못한 성도의 삶도 나무랄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성도라면 환경이나 능력이나 업적 여부와는 전혀 관계없이 누리는 게 주님을 만난 기쁨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약속을 붙잡은 소망이 넉넉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제자가 맞는다면, 그의 삶은 자기 손해와 자기 죽음까지 전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때 비로소 누림이 아닌 나눔의 삶, 즉 십자가 사랑의 삶이 가능하다. 그 사랑은 믿음의 기쁨과 소망의 넉넉함을 가진 자만이 증명 가능할 것이다. 사랑이 그 셋 중 으뜸인 것은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