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새기는 묵상] 호라티우스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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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사실 바로 그것뿐입니다. 이를 아십시오. 하나님의 권위를 근거로 이것을 아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를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죄악 됨을 느끼든 못 느끼든, 이것을 근거로 행하십시오.

복음은 성경에 있고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공통되는 것 외에는 우리 자신에 관한 어떤 증거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있고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공통되며,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한 가지 입증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구주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 필요 때문입니다. 믿음이 은혜의 보좌 앞에 서는 것은 바로 이 필요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이 내게 만족스러운가가 아니라, 나는 궁핍한 죄인인가, 그리고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만족하고 있는가입니다.

여러분은 또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내 사랑이 내게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만족스러울 거라고 기대했습니까? 여러분에게 평강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값없이 사랑해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믿지 않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측은히 여기는 사랑이요, 다른 한 가지는 믿는 자녀들을 향한 기쁨과 만족의 사랑입니다.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집에서 고분고분 순종하는 충실한 아들에 대한 사랑과 종류는 비록 달라도 동일하게 지극히 진실합니다.

여러분이 믿는 사람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여러분을 믿는 사람으로서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불쌍한 죄인으로 사랑하십니다. 죄인에게 최초의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추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 값없이 풍성한 사랑은 죄인을 만족시키고 죄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호라티우스 보나 Horatius Bonar (1808-1889) <오직 예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