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현필의 북카페|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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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 민현필 목사, 중동교회 교육담당 >

|존 페스코 저, 강희정 역, 부흥과 개혁사, 240p|

 

언약과 창조의 관계를 논증하기 위한 주해들에서 통찰력 돋보여

 

 

이 책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별 5개를 주고 싶다. 정말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체에 번역자의 실력도 한 몫 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일관되고 분명한 논지가 참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언약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꼭 읽어볼 만한 필독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인 존 페스코는 창세기 1-3장에 나타난 ‘창조론(protology)과 성경 전체에 나타난 언약들’과의 상관관계를 집중적으로 추적하면서, 태초의 첫째 아담에게 의도하셨던 창조의 목적은 바뀌지 않았으며 이후에 새로운 ‘아담들’을 통하여 계속 그 목적이 실현되도록 섭리하셨고, 마침내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1-3장은 성경의 서론만을 장식하고 사라져도 좋은 그런 장들이 아니라 이후 구속사의 단계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실 때 주요한 패턴으로 다시 재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론(protology) 속에는 이미 종말론적(eschatology) 함의가 담겨 있게 되고, 구원론 속에는 창조론과 종말론과 기독론이 함께 맡물리게 된다는 것이다. 존 페스코는 한 각주에서 쿰란 공동체의 예를 들며 이러한 종말론적 해석학이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

 

“너는 시대의 끝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 고대의 것들을 살펴볼 것이다“

<쿰란 공동체(4Q 298 frs. 3~4ii)>

 

옛 시대의 한복판에 종말은 이미 도래해 왔으며, 우리가 얻은 구원은 이러한 종말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특징은 태초의 첫째 아담과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대칭적 관계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으로서 종말론적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페스코는 창세기 2장의 안식일 역시 종말에 도래할 완전한 구원과 영원한 안식에 대한 종말론적 표지였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주장을 재진술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책이 지니는 진짜 가치는 창세기 1-3장에 대한 기존의 편협하고, 왜곡된 해석들에 대한 적절한 비평과 ‘언약과 창조’의 관계를 논증하기 위해 제시하는 탁월하고 통찰력 있는 주해들에 있는 것 같다.

페스코의 말처럼 창 1-3장은 과학을 성경에 끼워 맞추려는 ‘창조과학의 텍스트’도 아니며, 문서설을 주장하는 비평학자들의 레고불럭도 아니다. ‘창조의 패턴’ 속에 담겨진 요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속하시는 ‘구속의 패턴’을 제공하며 서로 공명하고 있다. 둘째 아담의 구속 사역은 첫째 아담의 창조시 받았던 통치 명령을 모르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페스코는 서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 자체가 성경의 해설자이다(Sacra Scriptura est sui interpres)”

 

나는 페스코의 이런 논증 방식이 맘에 든다. 즉, 성경에 대한 그릇된 관점이나 해석들을 성경 자체의 문맥과 의도를 풍성하게 드러냄으로써 무효화시키는 방식 말이다. 로이드 존스가 주로 사용했던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1-3장을 가지고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를 논쟁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그런 의도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성경과 과학은 영역이 다르다는 식의 이원론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느끼는 아쉬움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모세 언약을 행위 언약의 반복으로 묘사하려 한다는 점(p.152)

페스코는 이 점을 논증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인용한다. 과연 웨스트민스터 디바인즈들이 그런 관점을 갖고 있었을까? 이 부분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페스코는 ‘행위 언약의 재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행위 언약의 목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이 책에서 좀 모호하게 다가왔던 부분이다. 또, 흥미롭게도 이 책이 저술되는 과정에서 페스코와 긴밀히 의견을 주고 받았던 ‘데이비드 반드루넨’ 역시 이런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페스코가 반드루넨이나 클라인과 조금 다른 점은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의 연속성을 충분히 인정한다는 점이다.

둘째, 문화사명에 대해서

페스코는 반드루넨과 같이 우리가 ‘일곱 째 날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은 오직 둘째 아담의 공로 때문임을 지적한다. 또, 둘째 아담은 ‘둘째 하와’인 교회의 도움으로 이 땅에서 통치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 면이 아쉽다.

교회가 얻은 구원과 안식이 종말적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은 좋았지만, 정작 그 이후에 교회가 어떻게 종말적인 자세로 문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인지를 좀 더 충분히 강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둘째 아담의 지상명령’은 창세기 1장의 ‘통치명령’을 염두한 것(p.202)이라는 점을 잠깐 언급하기는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