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차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정례회
“가톨릭 왕군에 맞선 위그노 전쟁은 파리가 코끼리를 이길 수 없지만, 코끼리가 파리를 이기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잘 보여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파리가 ‘민중의 파리’일 때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파리’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는 2월 16일(목) 수원 소망교회당(김정민 목사)에서 ‘제7차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정례회’를 개최했다.
위그노 전쟁 발발 460년을 기념, ‘위그노 전쟁 – 코끼리와 맞선 파리’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강좌는 현장과 온라인 강의를 병행한 가운데 100명이 함께 참여했다.
정례회에 앞서 드려진 예배는 김춘기 목사의 사회로 최칠용 목사가 ‘도전받는 진리’(행 20:28-32)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진 첫째 강연에서 조병수 박사는 ‘위그노 전쟁의 맥락과 의의’를 발표하고, 바씨 학살(1562년) 이후 낭트 칙령(1598년)까지 36년 동안 지속된 여덟 번의 위그노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정리하는 한편, 위그노를 위한 외국의 참전을 고찰하는 가운데, 위그노 전쟁에서 저항이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초점을 맞춰 발표했다.
조 박사는 “위그노가 무모하게 여겨지는 전쟁을 강행한 근본적인 이유는 위그노가 가톨릭 프랑스 왕국에서 자신의 신앙을 공인받으려는 데 있었다”라며 “신앙의 양태를 선택할 양심의 자유와 자기의 방식을 따르는 예배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위그노의 목적이었다”라고 했다.
조 박사는 “그러나 가톨릭의 눈에 위그노는 일치를 깨는 이단으로 보였고, 위그노의 눈에 가톨릭은 진리에서 벗어난 오류로 여겨짐에 따라 양 진영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수행했다”라면서 “여덟 번의 전쟁은 약탈, 파괴, 살육, 지도자 암살 같은 일들을 반복하였으며, 매번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새로운 마찰을 계기로 전쟁이 재개됐다”라고 했다.
특히 “위그노 전쟁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외국의 참전”이라면서 “외국의 참전이 국면마다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것은 위그노 전쟁이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는 의미로, 외국의 참전은 신앙의 동질성에서 기인하거나 정치적인 이득을 노리는 것을 목적 삼았다”라고 밝혔다.
끝으로 “위그노가 왕실과 전쟁을 치른 데는 신학적 배경이 있었다”라면서 “전쟁 수행의 정당성에 관한 신학적 논의로 저항이론과 맞물려 있다. 위그노 전쟁과 관련하여 중요한 저항이론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칼뱅의 이론과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 베자의 이론”이라고 전하고 “공통점은 하나님 경외와 예배를 박탈하는 폭군에게 하위 행정관들이 저항할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8회 정례회 8월 17일 개최 예정
둘째 강연에 나선 이남규 박사는 ‘위그노 전쟁과 독일의 참전-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중심으로’란 주제로 강의했다.
이 박사는 “프리드리히 3세는 팔츠 선제후로서 개혁신앙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작성을 지시한 인물로 유명하나, 팔츠 밖의 개혁파를 위한 그의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라면서 프리드리히 3세의 종교개혁을 위한 정치 외교 활동이 왕성하였고, 특히 프랑스 위그노를 위한 지지 활동이 독보적이었음을 이번 위그노 정례회를 통해서 보고했다.
또한 “프리드리히 3세는 위그노가 박해받는 이유가 그들의 신앙의 진실성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독일 개신교 내에서 모두가 위그노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라며 “프리드리히 3세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소수의 루터파 제후들이 동정했을지라도 공식적인 국제 연맹의 성격으로 위그노를 돕는 일은 무산됐다”라고 밝혔다.
끝으로 “비록 그의 외교정책과 참전 승인이 뚜렷한 성과를 가져오지는 못했으나 개혁파 신앙인으로서 자기 지위에서 종교개혁과 개혁신앙을 지지한 헌신과 노력은 이후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분명히 발견된다”라면서 “프리드리히 3세의 활동을 볼 때, 개혁신앙의 전파는 신학자와 목회자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각자 자리에서 헌신할 때 가능하다”라고 이남규 교수는 제언했다.
한편, 위그노 연구소는 2023년 8월 17일(목) ‘위그노의 박해와 순교’라는 주제로 제8회 정례회를 가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