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신앙생활을 차후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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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차후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

전도서는 타락한 세상, 부패와 허무로 점철된 인생살이를 벗어나기 위해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결론짓는다. 인생의 궁극적 답이 무엇인가? 그것은 도덕, 철학, 심지어 부패한 심성에서 발현된 종교적 깨달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만 있다. 우주와 인생을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고상한 지혜는 그리스도이시다.

솔로몬은 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지혜를 논하는 전도서의 결론을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맺는다. 여기서 “기억하라”는 단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사용할 때가 있다(출 20:8; 신 25:17; 사 44:12). 단지 어떤 사실을 기계적으로 기억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본문의 맥락을 보면, “경건한 마음으로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경건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경건한 의미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화된 마음과 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기억하라”는 말씀은 “너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태도로 바라보고 믿고 순종하라”는 의미다. 인생은 이와 같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경건한 마음과 태도로 바라보고 의지해 살아가야 생명을 누린다.

솔로몬은 이처럼 전도서의 결론을 맺으면서, 이 교훈과 관련하여 몇 가지 권고를 준다. 여기서 권고라 함은 인생이 창조자를 기억해야 하는데, 창조자를 기억하는 일이 노년의 때가 아닌 청년의 때 시작되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속에서 조금이라도 일찍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후의 구절들은 왜 청년의 때에 신앙을 붙들어야 하는지를 교훈한다.

전도자는 우리의 인생이 다 흘러가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권고한다.  “곤고한 날”,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라는 표현은 노년의 때를 가리킨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때가 어느 때든지 우리에게 호흡이 멈추기 전에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믿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은 한 번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속성을 가졌다고 할 때, 노년의 때가 되어서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날들을 헛되게 탕진하게 되는 병폐가 있다.

왜냐하면 노년의 때는 인생과 신앙을 정리하고 일생 일구어온 신앙의 씨앗이 결실한 것을 거두어들일 때이지 무엇을 시작하고 진행할 때가 아니란 것이다. 농사도 때가 있다. 즉, 농사일은 철저히 때를 따라 진행된다. 심을 때가 있고 가꿀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 때를 놓치면 아무런 결실이 없다. 겨울에 씨를 심고 봄에 추수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청년의 때 시작해야 한다. 청년의 때 심어야 한다. 그래야 평안한 마음으로 노년의 때 결실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

우리는 병들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병들고 죽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남아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을 창조자를 기억하여 믿고 순종하며 삶을 살아내라는 부르심의 기회요 시간이라 생각하며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래서 젊은 날을 방탕하다 돌아온 성도들이 “늦게 믿은 것도 은혜이지만, 조금 더 일찍 하나님을 알았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라고 말하는 것을 가끔 듣게 된다.

젊은 날을 탕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젊음이란 시기에 주신 왕성한 생명력과 힘을 하나님과 신앙의 가치를 위해 사용할 복된 기회를 소진하고 상실한다는 의미다. 복된 인생의 모범은 청년의 때 창조자를 기억하여 인생을 주님과 성실히 경건히 동행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과 은혜로 주어진 인생을 채워가다가 우리는 노년을 맞이해야 한다. 청년의 때 창조자를 바라보며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그의 노년을 평안히 정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내일로 미루고 노년의 때까지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