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유두고의 죽음

0
169

유두고의 죽음

청년에 대한 관심은 성경 도처에 꿈틀거린다. 성경 여기저기에 청년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대표적으로 구약에는 이삭, 요셉, 다윗이 등장하고, 신약에는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신 부자 청년, 나인 성에서 살려내신 과부의 아들, 바울의 드로아 고별 집회에 참석했던 유두고가 등장한다. 스데반의 순교에 한 몫을 담당했던 사울(바울)이 청년이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물론 성경이 청년에게 비판적 태도를 전혀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디모데에 대하여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권면하고, 요한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청년들이 악한 자와 싸울 것에 관해 교훈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힘입어 교회는 당연히 청년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교회에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한동안 교회 밖에서 기독 대학생 운동이 활발해지자, 교회 안에도 부수적인 효과가 꽤 나타났다. 시시 때때로 청년들의 집회가 곳곳에서 열을 올리며 펼쳐졌다. 주말뿐 아니라 주중을 이용하는 정기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비롯해서 여름, 겨울 방학을 활용하는 단기 집중 수련회가 전국에 성행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교회에서도 파라처치에서도 젊은이들이 썰물 빠지듯 자취를 감추더니 지금은 썰렁하게 빈 상태가 되었다. 교회의 청년 담당자들은 청년들을 모임에 나오도록 구슬리기에 바쁘고, 선교단체 간사들은 다른 일을 찾아 도망가는 대학생들을 뒤쫓기에 바쁘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임은 의심할 바 없다. 이념을 다투던 시대에는 청년들이 뭔가 형이상학적 사안을 놓고 심각하게 토론도 벌였다. 그때는 교회의 청년들도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성경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청년들이 작건 크건 돈벌이에 눈을 뜨면서 마음과 시간과 힘을 거기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믿는 청년들에게도 순식간에 쇄도하여 점차 교회에 나오는 발걸음이 뜸해지더니 마침내는 그들이 늘 차지하던 자리가 빈 채로 남겨지고 말았다. 그러나 청년들이 교회에서 사라진 까닭을 시대의 탓으로만 돌리기엔 뭔가 석연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했는지 물어야 한다. 무엇보다 교회가 시대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 너무 느려 대응을 제대로 못한 것이 표면적인 문제일 것이다. 힘을 주체할 수 없는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에서건 교회가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청년들은 교회에서 자신을 표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사회는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청년들을 끌어가는데, 교회는 청년들을 머물게 하는 일에 제자리걸음을 하다못해 퇴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뒤늦게 문제를 인식한 교회는 청년들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아 나섰고, 그 결과로 마련된 것이 주로 찬양을 통한 해법이었다. 규모가 크건 작건 교회들은 여기에 사활을 걸면서 처음엔 음향시설을, 다음엔 영상시설을 바꾸었다. 나름의 의미가 있긴 했지만 결국 이것은 청년들의 요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청년들이 보기에 교회는 절대 세상의 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재미와 관련해서 교회는 본질상 세상보다 앞설 수 없기 때문이다. 어쭙잖은 재미 공세가 오히려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주고 말았다. 그나마 겨우 교회에 남아 진리를 추구하던 청년들마저 떠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교회가 세상보다 만족을 덜 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에서 더 이상 진리의 가르침을 통한 영적 충족감을 얻을 수가 없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청년들의 영적 욕구를 파악하지 못하여 잘못 대응한 것이 교회의 이면적인 문제이다. 일차적으로는 재미없는 교회가 청년들을 내몬 셈이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재미를 추구하는 교회가 그나마 남아 있던 청년들을 내몬 셈이 되었다.

바울의 드로아 고별 집회에서 청년 유두고는 왜 안쪽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지 않고 위험스럽게도 3층이나 되는 창문에 걸터앉았을까? 시원한 밤바람을 쐬며 졸음을 쫓아버리기 위해서였을까? 혹시 어른들이 바울 가까이에 앉으려고 앞자리를 다투는 바람에 청년 유두고는 창가로 밀려난 것이 아닐까? 청년들에게 무심하고 청년들을 우대하지 않는 교회의 한 모습이 아닐까? 진리를 들으려던 그때의 유두고는 교회에서 죽었고, 청춘을 즐기려는 지금의 유두고들은 세상에서 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