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04>| 고통의 때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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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때

누가복음 7장 31-32절;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사회가 작동하기 위해 인정하고 지켜야 할 약속조차 무너지고 있어

 

 

이 시대의 사람들을 무엇으로 비유해서 말 할 수 있을까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무엇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직접 던지신 바로 그 질문입니다.

질문을 던지신 예수님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비유로 들어 답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꼭 이 아이들 같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장터에 모여 두 패로 나누어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에는 그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게임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게임이 가능하게 하는 약속은 이것입니다. 한 쪽의 아이들이 잔치집의 노래를 피리로 불면 다른 쪽의 아이들은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쪽의 아이들이 초상집의 곡을 하면 다른 한쪽의 아이들은 우는 것입니다.

한 쪽의 아이들이 피리를 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쪽의 아이들이 춤을 추지 않습니다. 피리를 분 아이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었으니까 너희들은 춤을 추어야 되잖아? 그런데 왜 춤을 추지 않는 거야?” 춤을 추지 않는 다른 쪽의 아이들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을 합니다. “네 잔치지 내 잔치야? 너 좋은데 내가 왜 춤을 춰?”

한 쪽의 아이들이 곡을 합니다. 그런데 울어야 할 다른 쪽 아이들이 울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의를 합니다. “우리가 곡을 하면 너희가 울어야 되잖아! 그런데 왜 안울어?” 울지 않은 아이들이 시큰둥하여 답을 합니다. “너희가 슬프지 우리 슬퍼? 네가 슬픈데 왜 우리가 울어? 네 자식 바다에 가라앉아 죽었지, 내 자식 죽었어?”

게임은 더 이상 작동을 하지 않고 거기서 끝장이 납니다. 게임을 이렇게 망쳐버린 한 복판에는 지독한 자기중심성과 이기적인 탐욕, 그것이 만들어내는 비정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가지고 이 세대의 사람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자 하셨습니다.

오랜 세월 후 사도 바울은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하면서 이 세대의 이 문제를 더욱 직설적으로 지적하며 들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이 세대”는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말세를 포함하고 있고,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말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대를 포함합니다.

사도는 이 세대를 가리켜 고통의 때라고 단정합니다. 그리고는 이 세대가 드러내는 고통의 양상을 다양하게 열거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무정하며, 원한을 품으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고통의 종류도 다양하고, 고통을 유발하는 양상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가 고발하고자 하는 이 모든 현상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독한 이기심입니다. 냉혹하고 매정한 자기중심적 탐욕입니다.

아이들의 게임에서처럼, 한 사회에도 그 사회가 제대로 작동을 하고 성립하려면 그 사회의 일원 모두가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노래를 하면 춤을 추어주고, 곡을 하면 울어주는 약속입니다. 함께 살고, 더불어 살고, 상대방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때로는 양도보 하고 때로는 맞추어주기도 하는 멋스러움입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사회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하여 모두가 인정하고 지켜야 할 약속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고통합니다. 이 세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각각의 고통을 걸머지고 살아갑니다. 모두가 자기에게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교회나 정치집단이나 모두가 이 원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묻고 답합니다. “너 그것은 다른 사람을 헤치는 것이니까 하면 안 되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해?” 고통하는 세대의 모두의 대답은 동일합니다. “내가 하고 싶으니까!”

또 묻습니다. “너 이렇게 해야 되는 거잖아. 그런데 왜 안해?” 고통 하는 말세를 사는 이 사회의 사람들의 대답은 모두 동일합니다. “내가 하기 싫으니까!” “만 명도 더 모이던 교회가 싸움통에 천 명도 안남았는데 왜 아직도 싸워? 교회가 없어지겠잖아?” “우리가 이겨야 하니까!”

자기 행동과 처신과 의사를 결정하는 최우선의 절대적인 기준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호불호와 이불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방만이 아니라, 점차 나 자신을 죽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사회가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무서운 자기 집착과 이기적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잔치 집을 위하여 함께 춤추고, 초상집을 위하여 함께 울어주어야 하는 사회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즐거운 놀이가 다시 작동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