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 지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자!
변세권 목사(온유한교회, 본보 논설위원)
신앙 또는 믿음이란, 성령에 의해 일으켜진 것이어야 참되므로, 그런 경우 전인으로서의 지정의 곧 지성과 감정, 의지가 하나의 목적아래 일치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목적이란, 성경전체의 결론이 그러하듯이 (1)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자리매김의 토대에서 (2)세상의 통치에 거슬러 하나님의 통치를 받들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자기로서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왜 거부하고 저항하는가 하면 일단 세상에 속한 것들로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르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죄라고 할 경우 먼저는 종개념의 시각이 아닌 유개념을 차원에서 총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사탄은 죄를 종개념의 차원, 곧 하나님 명령의 각기 개별적인 계명들 하나하나에 눈을 돌리도록 미혹하는데, 그렇게 하여 인간 공통의 ‘자기 자랑의 심리’를 불쏘시개로 삼는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라는 허망한 구호를 그렇게도 목 놓아 부르짖는 현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을 인간은 도덕성 계발 정도로 감소시키는 것이요, 신국 곧 온 시간세계를 포괄하는 거대하고 장엄한 제도와 규모의 하나님 나라를 축소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면 성경진리에 대한 가감죄에 빠지기 십상이다.
역사 속에서 개혁교회가 출범하게 되었을 때 그들 개혁신앙인들의 집단지성은 정확하게 이 미묘한 문제를 능히 간파해 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들은 죄에 대한 일차적인 정의를, 사람으로서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삶의 철학 곧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을 저버리고, 자기 자신을 떠받들며 사는 자기숭배 곧 명백한 우상숭배에서 정의를 찾았다. 하지만 한 단계 더 깊은 통찰도 잊지 않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삶의 ‘영역 이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의 모태의 품에 안겨,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께서 베푸시는 구원론적인 통치 전반을 공급받아 나가는 데서 비로소 성령을 좇아 행하라 라고 한 바에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신앙의 모태라고 칭하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그 이상 조금도 틀리지 않는 신앙적 표현은 없다고 보았다. 그러한 개혁자들 중 존 칼빈은 단연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의 신학과 신앙은 기독교 강요에 온통 녹아 있고, 실제로 제네바 교회를 일평생 섬긴 데서도 매우 실천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이라고 하는 두 거장을 내셔서 과거 초대교회가 도달하지 못한 채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습으로 삐꾸러져버린 데서 그렇게 목숨을 걸게 하시면서 까지 기어코 개혁하여 원상의 교회를 이루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개혁주의자들이라고 하면서 말끝마다 칼빈주의니, 개혁교회니, 장로교회니 하는 말만을 해대는 것일까? 그러면 이토록 신앙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에 우리는 진정 어떻게 서 나가야 하는 것인가?
교회인 우리는 다시 한 번 각성해야 한다. 단지 크고 많기만 하면 무조건 정통이 아니다. 그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증거는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의 신앙고백과 교회 정치를 저버렸다는 데서 명확하다. 우리의 모든 교회는 하나의 총회이자, 노회이자, 하나의 지교회로서 과거 종교개혁을 통하여 드디어 완성된, 바로 그 참된 교회로서의 자리매김에 총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 이 일은 끊임없는 자기부인의 토대 위에서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져나가는 데서 가능할 것이다. 좀 더 분별하고, 좀 더 고민하고 그리고 좀 더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가장 큰 결함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저버린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의 유산을 잘 이어받고, 현시대에 잘 누림으로써 자연스럽게 후대의 역사 속으로 귀하고 아름답게 물려줄 수 있어야 한다. 우선 각기 자기 몫의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에서 부터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해 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