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난 중의 탄식 _ 임형택 목사

0
267

고난 중의 탄식
욥기 3:1-26

임형택 목사(숭신교회)

 

사람이 살면서 실패도 없고, 우환도 없고, 아픔도 없기를 바라고 사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좋은 일도 있지만, 실패도 있고 우환도, 아픔도 겪을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사는 것이 좋을까요? 어느 것이 좋을까요? 항상 좋은 일이 있고, 성공할 수 있고, 꿈을 이룰 수 있고, 돈도 잘 벌 수 있고, 자식도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좋을까요?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도 있고, 돈을 잘 벌 수도 있지만 못 벌 수도 있고, 자식이 잘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까요? 어느 것이 좋을까요? 어떤 생각을 품는 사람이 세상을 더 잘 살까요? 어떤 생각으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전자가 좋으십니까? 후자가 좋으십니까? 저는 후자입니다. 저는 세상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는 생각을 품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면 나쁜 일이 많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미신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기도를 해도 좋은 일만 생기게 하시고, 돈을 잘 벌게 하시고, 항상 건강하게 하시고, 자식도 항상 잘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며 살게 하시고, 아픔과 슬픔을 이기며 살게 해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하는 일에 은혜를 주시라고 기도하고, 믿음이 자라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살게 해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고, 세상을 훨씬 잘 삽니다.

욥은 두 번 고난을 겪었습니다. 두 번 다 아무런 잘못 없이 겪었습니다. 그 고난들은 끔찍했습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서운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고,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첫 번째 고난을 겪었을 때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었는데 그동안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받아 누리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셨어도 그동안 많은 것을 주신 하나님이 찬양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고난을 겪었을 때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

인생이 복만 받고 살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복을 주시면 복을 받고, 재앙을 주시면 재앙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인생이므로 재앙도 받아들이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인생을 훨씬 잘 삽니다. 우리에게 이런 자세가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생각입니다. 이런 믿음을 품고 살기를 바랍니다.

 

탄식하는 욥

 

그렇다면 고난을 겪을 때 힘들다고 탄식하면 안 될까요? 내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알게 해 주시라고 탄식하면 안 될까요? 나는 잘못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겪는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 되느냐는 것입니다. 안 될까요? 욥은 재앙을 당했을 때 탄식했습니다. 저렇게 탄식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탄식했습니다. 탄식을 이해하지 못한 친구들이 믿음이 없다고 책망할 정도로 탄식했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는 욥이 고난을 겪을 때 토해 낸 탄식을 살펴보겠습니다.

욥이 재앙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욥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 있었고, 백발이 성성한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친구라고 한 것은 그만큼 욥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재앙을 겪은 지 칠일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비로소 욥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말하기를 시작하는데 먼저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일을 당하고 보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했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때 어떤 말을 했는지 보실까요? 3:3입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욥의 엄마가 욥을 낳던 그 날이 세상의 종말이었더라면 좋을 뻔했다는 뜻입니다. 그날 밤에 온 세상이 망했더라면 좋을 뻔했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아들을 임신했다고 좋아했던 그 밤이 망했더라도 좋을 뻔했다는 뜻입니다. 욥은 고난을 겪었을 때 죽지 않고 출생한 것을 탄식했습니다.

3:11에는 더 직설적으로 탄식합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 아니하였던가.”

이 세상에 나올 때 차라리 죽어 나왔더라면 좋을 뻔했다는 뜻입니다.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재앙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재앙을 당하고 보니 이 세상에 태어난 것 보다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복이라는 뜻입니다. 욥은 그렇게 말하기를 한두 번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모두 스물세 번이나 했습니다. 3:3처럼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이라는 식으로 말한 것은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열여섯 번이나 탄식했습니다. 3:11처럼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라는 식으로 말한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저주한 것입니다.

3:13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말합니다.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이것은 죽은 자를 예찬하는 말입니다.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이 태어난 아이보다 더 복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기를 모두 스물세 번이나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똑같은 말을 스물세 번이나 한 셈인데, 똑같은 말을 이렇게 많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욥의 고통이 극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욥은 그렇게 힘들었고, 힘들다고 탄식했습니다.

 

탄식을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여쭌 대로 그리스도인이 이런 말을 해도 될까요? 아무리 힘들다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고 말해도 될까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해도 될까요? 그것은 불신앙이 아닐까요? 하나님께 불경이 아닐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탄식과 원망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탄식은 몸이 아플 때 내는 신음과 같고, 자신이 힘들다고 말하는 하소연과도 같습니다. 원망은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탄식은 신앙인에게 허용되지만, 원망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힘들면 기도할 때나 찬양할 때 힘들다고 탄식해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을 기도로 알아들으십니다. 그러나 원망은 육신의 생각이고, 죄의 생각입니다. 원망은 하면 안 됩니다.

시편을 보면 탄식시가 나옵니다. 그 외에도 탄식 기도가 나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사무엘을 낳을 때까지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한나를 많이 위로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작은 부인 브닌나가 한나의 마음을 괴롭게 했을 때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괴로운데 브닌나로 인해 서럽고 억울한 감정까지 북받쳐 올랐습니다. 한나는 괴로운 마음 때문에 기도할 때 통곡했습니다. 통곡했지만 큰 소리로 울지 않고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제사장이 기도하는 한나를 봤을 때 꼭 술 먹은 여자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흐느끼는 소리를들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힘들고 서럽다고 토로하는 탄식이었습니다. 서럽고 힘든 나를 도와주시라는 간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소리를 기도로 들으시고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도 한나처럼 괴롭고 서러울 때 흐느끼며 탄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는 자녀를 안 주십니까? 왜 저를 이렇게 살게 하십니까? 제가 얼마나 힘든지 아시잖아요?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탄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저주의 고통을 당하실 때 탄식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는데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까?”라고 외쳤습니다. 이 기도도 탄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탄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몸살 나면 앓는 소리를 냅니다. 저는 몸살을 앓아도 앓는 소리를 잘 안 합니다. 그래도 잠자다가 몸살 나면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는 모양입니다. 제 아내가 앓는 소리를 듣고 깨우면 그때야 몸살이 난 것과 앓는 소리를 낸 것을 압니다. 탄식이 그와 같습니다. 아플 때 몸이 아프다고 앓는 소리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탄식은 마음이 앓는 소리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신음을 기도로 들으십니다. 몸살이 났을 때 신음을 내면 조금 참을 만하고, 덜 아프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음을 안내 면 더 아픈 것 같고, 내면 덜 아픈 것 같습니다. 탄식이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탄식을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망이 아닌 탄식을 하다

 

욥기 3장에서 욥이 한 말은 탄식이었습니다.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 탓으로 돌린 것이 아니라 견디기가 너무 힘들다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께 응석을 부린 것이고, 아프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해 주시라고 탄원한 것입니다.

시집간 딸이 사는 것이 힘들다고 친정엄마를 찾아와 목 놓아 울 수 있습니다. ‘엄마, 왜 나를 낳았어? 왜 나를 낳아서 이렇게 고생하게 하는 거야. 차라리 낳지 말지. 차라리 지워 버리지. 그랬더라면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을 것 아니야.’ 그 말을 들은 친정엄마는 딸을 꼭 끌어안아 주시면서 말합니다. ‘그래. 힘들지. 그래. 울어라. 울고 싶은 대로 울어. 그리고마음 털고 다시 일어나라. 좋은 날이 올거야.’ 탄식이 그와 같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드실 때가 있습니까? 탄식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탄식을 들으십니다. 우리의 신음을 들으십니다. 들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사정을 들으시고 도우십니다. 고난을 겪을 때 억지로 버티기보다는 탄식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22을 보면, 첫 번째 재앙을 당했을 때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7:11을 보면 친구들과 논쟁을 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1:22에서는 욥기를 기록한 기자가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고, 7:11에서는 욥이 자기 입으로 원망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것이 맞을까요? 욥이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것입니까? 안 했다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히브리어 원문을 봐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2에서는 ‘나탄’(ןַ֥תָ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누구 탓으로 돌리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대로 ‘원망’이라는 뜻입니다. 욥은 자신이 재앙을 당한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7:11은 이와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여기에서는 ‘아시타’(אשיחה)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뜻은 ‘대화하다, 여쭈겠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왜 이렇게 힘든 일을 당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여쭈겠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욥은 재앙을 당했을 때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이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여쭌 것입니다. 이것이 탄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을 겪을 때 탄식해도 됩니다. 탄식해도 하나님께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에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 비난이 될 수 있습니다. 탄식은 사람에게보다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겪을 때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탄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짓을 하면 안 됩니다.

욥도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탄식을 했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탄식했지만 살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살려 달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는 감사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으므로, 살려 주셔서 감사하고 찬양하게 해 주시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욥의 탄식은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힘들다는 신음이었고, 살고 싶다는 기도였습니다.

만일 욥이 죽는 게 더 낫겠다고 탄식하고 어리석게 죽었다면 회복의 축복을 누렸을까요? 고난이 끝났을 때 전보다도 갑절이나 더 복을 받았고, 자식도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140년을 더 살면서 자손 사대를 보았습니다. 고난을 겪을 때 절망하고, 어리석게 행동했다면 그런 복을 누렸을까요? 누리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사울 왕이 죽이겠다고 군대를 동원해 추격했을 때 살겠다고 블레셋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왕의 신하들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다윗은 죽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기지를 발휘하는데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놈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위기에서 벗어났고 훗날 왕이 되었습니다. 그때 절망하고 자결하거나 싸우다 죽었다면 왕이 되는 복을 누렸을까요?

아무리 고난이 힘들어도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죽고 싶다는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도 절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포기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절망감이 들지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되지 않거든 신음을 내며 탄식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탄식을 들으십니다. 그 신음을 기도로 들으십니다. 들으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도우시고 살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도 욥처럼 역경을 당했을 때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탄식하며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욥을 도우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 도우심으로 역경을 이기고, 아픔을 이기고, 슬픔을 이기며 살기를 바랍니다.

– 임형택 저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러십니까?, 2021. 세움북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