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평신도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_이승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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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후예들이 평신도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

이승구 교수(합신, 조직신학)

 

세상에서 다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 우리들은 상당수의 단어들을 그 근원도 생각하지 않은 채 사용한다. 그러나 어떤 단어들은 특정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 너무 분명하기에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 지를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런 단언의 하나로 “평신도”(laymen)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천주교적 사상을 담아 천주교에서 형성된 용어인 평신도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평신도라는 용어는 천주교에서 나온 단어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용어들이 처음에 천주교에서 나왔으니 천주교에서 온 단어라고 해서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평신도라는 용어는 독특한 천주교 사상이 담겨진 용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교회 중에서 일부는 성직자이고 성직자가 아닌 분들은 평신도라고 부르는 사상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성직자는 가르치는 교회이고 평신도는 가르침을 받는 교회라는 천주교회의 위계적 이해에서 나온 용어가 바로 평신도라는 용어이다. 더 온전히 주께 헌신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고 그저 주님을 따르는 분들이 있는데 이렇게 일반적으로 주님을 따른 분들이 평신도라고 하였고 교회는 오랫동안 이런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러므로 이는 성직자가 아닌 신도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종교개혁의 가장 기본적인 중심 주장의 하나 : 만인제사장주의

다른 모든 신부님들과 같이, 천주교 사상에 매우 충실하여 교회에서 독특한 사제(priest)라는 의식에 충실하여 사제가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일인 성찬을 행할 때 자신의 기도와 성찬 집례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이 일어난다고, 즉 사제가 축성(consecration)할 때에 성찬의 요소들인 빵과 포도주의 질료(matter)는 그대로 있으나 그 본질(substance, form)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소위 “본질이 변한다는 견해”(화체설, transubstantiation)를 신봉하면서 열심히 천주교 사제로 활동하며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루터의 생각이 성경을 제대로 연구하면서 변화되었다. 이 일을 수행하는 신부님들이 정성껏 바치는 것이 희생제사(sacrifice)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오직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죽음만이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제사를 완성하는 것이고, 십자가에서의 죽음만이 이제 반복될 수 없는 희생제사라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깨달음의 하나이다.

따라서 부차적으로 이 일을 행하는 사람이 제사장, 즉 사제(priest)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면 구약에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신약 시대에는 제사장이 없는가? 이에 대해서도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라는 생각이 나왔다. 이를 흔히 “만인제사장주의”라고 한다. 이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말이 아니고, 이제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다 제사장이라는 생각을 이렇게 번역한 것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라는 말씀이 백성들에게 아주 명백히 각인되기 시작하였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는 명령 아래 있고, 모든 성도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주께 드리는 제사장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만인 제사장 사상의 성경적 근거이다.

만인성직자주의

그 함의를 생각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 함의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만인 제사장 사상을 말하고 그친다. 그러나 이 사상에 충실하면, 이제 신약 시대에는 모든 성도가 다 성직자이다. 모든 성도들 다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을 감당하는 성직자들이다. 우리 모두 거룩한 직분을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 구약의 왕, 제사장, 선지자의 직분이 이제 보편화되어 우리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알고 전하며(선지자직), 그 뜻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거룩히 하여 주께 드리며, 다른 분들도 그렇게 하도록 보살피고 주께 드리는 일을 하며(제사장직), 하나님의 뜻을 삶 전반에 적용해 가는 일(왕직)에 온전히 힘써야 한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이를 “보편적 직임”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삼중직이 이제 그 완성의 빛에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성도(聖徒)가 그 이를 그대로 거룩한 자들이고 거룩한 직임, 즉 성직(聖職)을 수행하는 성직자들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들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에 충실한 성도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는 신약의 모든 성도들이 다 목사의 일을 한다는 말은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성도들에게 이제 주께서 교회를 섬기도록 하기 위해 어떤 신자에게는 장로라는 직임을, 또 어떤 신자에게는 가르치는 장로, 즉 목사라는 직임을 그리고 어떤 신자에게는 집사의 직무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을 잘 섬기기 위한 이 독특한 신약 직임에 충실해야 한다.

따라서 평신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그렇다면 이 모든 것에서 나오는 결론은 무엇일까? 성경에 충실하고 종교개혁에 충실하려면 우리는 평신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참 교회 안에는 성직자, 평신도라는 구별이 있지 않다. 또한 성직자와 평신도에게 적용되는 이중 기준이 있지 아니하다. 우리들은 좀 덜 헌신해도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 모두가 성직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모두가 온전히 주를 위한 사람이라는 의식에 충만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성직자들인 우리 모든 성도들이 주님으로부터 교회인 성도들을 잘 섬기기 위해서 각기 다른 직임을 받고 있음을 잘 의식하면서 각기 주어진 직무에 따라서 주님을 제대로 섬겨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모두가 성직자라고 해서 우리 모두가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그 일을 위해 특별히 부름을 받고 준비하여 공식적으로 임직한 분들이 하는 것이다. 주변 성도들이 우리에게 그런 은사가 있다고 하고 모든 교회가 우리를 목회자 후보생으로 추천하면 일정 기간의 특별한 훈련과 죽고 살아나는 연단의 기간을 거쳐서 그런 말씀 사역자가 되는 분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그전에는 우리가 그냥 설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각기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주께서 부르신 대로 주님과 교회 공동체를 섬겨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참으로 헌신된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는 일정 부분만 하고, 나머지는 전적으로 헌신한 다른 분들이 해도 좋다는 천주교적 사상을 버렸기 때문이다. 참으로 종교개혁의 정신에 충실한 사람들답게 우리는 온전한 헌신을 주께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 회개하면서 자꾸 자신을 고쳐 나가고 온전히 주님과 교회에 헌신해야 한다. 그렇게 고치고 버릴 용어 중의 하나가 “평신도”라는 용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