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가진 이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
임용민 목사(새소망교회)
어릴 적 우리 동네에 한쪽 손이 없는 상이용사 아저씨가 있었다. 어린 내 눈에는 얼마나 무섭게 보였는지, 길에서 만나면 얼른 인사하고 지나치기 바빴다. 교회에도 늘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할아버지 집사님이 계셨다. 어린 내가 볼 때도, 할아버지 집사님이 눈이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되돌려 보면 이분들을 길에서 자주 만날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니 그 때도 가끔 길에서 만나면, 피차 못하는 동네 사는 이웃인데도, 수군거리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분들은 이런 식의 수군거림을 잘 아셨을 것이다.
그래서 답답하지만 집 밖에 나오지 않으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70년대 말, 80년대 초 한국 사회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실질적인 이동의 장애를 해결할 수 없었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올림픽도 치르고, 월드컵도 치르면서 장애인 올림픽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에 알려졌다. 심지어 장애를 가진 이들 중에 훌륭한 위인들도 많고 몸이 불편하지 않은 분들과 잘 어울려 사는 사회가 있다는 것도 알려졌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동 휠체어를 타고 강의하는 “스티븐 호킹” 박사, 시각 장애인 “강영우 박사”가 자주 소개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말아톤’ 같은 자폐 아동 마라토너 이야기가 영화로 나와서 자폐 아동을 둔 부모의 소원을 많은 국민이 알게 되었다. 그 소원은, 자폐에 걸린 아들보다 그 엄마가 “단 하루만 더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았다. 장애인들은 여전히 우리의 사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인식 정도에 머물러 있을 뿐, 장애를 가진 이들이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사회의 일원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최근에 장애를 가진 분들이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고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의 시위에 대해 어떤 정치인이 정상적인 사람들의 이동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봤다. 또 어떤 언론은 대통령이 바뀌자,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이동권을 확보하기 위해 반정부 시위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발언과 현상은, 우리 사회가 장애를 가진 이들에 대해 어떤 태도와 인식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정치인의 이런 발언에는 장애인에 대해 건전하지 못한 발언을 해도 자신의 득표에 지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또 언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제로 언급해도 우리 사회가 여전히 귀를 기울여 줄 것임을 전제한다.
실제 서울시에 장애인을 위한 학교를 신설하기 위해 장애 아동을 둔 부모가 정치인에게 무릎을 꿇기도 했다. 장애를 가진 이들은 단순히 약자이기에 우리 사회가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들은 우리 사회의 건전하고 정당한 일원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동권과 생존권이 보호돼야 할 뿐이다.
필자에게도 장애를 가진 가족들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정상인들과 동일한 역할을 사회에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사회 활동을 위해 이동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실정이다. 더욱이 지방은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하다. 실제 우리 사회는 이들의 소리를 잘 들어주지 않는다. 왜냐면 주변에 잘 보이지 않고 만날 수 없으며, 만나도 그 때만 생각할 뿐이기 때문이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사회가 이들의 이동권과 생존권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회적 재정적 비용 허비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언제 어디서나 당할 수 있는 장애에 대해 선제적인 조치를 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은 이런 발전된 사고방식을 갖는 것을, 단순히 선진 사회가 되는 것이라고만 여기지 말고, 하나님이 드러내신 인권의 보편성에 이르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4).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신 2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