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8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성경은 인간은 피조물로서 제한성과 유한성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창세기 1:26은 인간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형상”(ṣelem)과 나란히 하나님의 “모양”(demût)을 언급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명이 있다. 첫째는 “모양”이 “형상”의 의미를 제한한다는 설명이다. 헤밀턴(V. Hamilton)에 따르면, 구체적인 용어 “형상”이 가진 육체적 뉘앙스를 약화시키려고 추상적인 용어 “모양”이 첨가되었을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덤브렐(W. Dumbrell)은 인간이 하나님의 “정확한 모사”(exact copy)로 오해될 가능성을 피하려고 “모양”이 추가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모양”이 “형상”(하나님의 대리자)의 의미를 강화한다는 주장도 있다. 클라인스(D. J. A. Clines)는 “‘모양’이란 말은 인간이 지상에서 적절하고 충실한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보증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창세기 1:27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설명될 뿐 “모양”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형상”과 “모양”에 뜻의 차이가 없다는 의미일 수 있다. 프리젠(Th. C. Vriezen)은 둘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메튜스(K. A. Matthews)도 창세기 1:27과 창세기 5;1에서 각각 “형상”과 “모양”이 홀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며 용례에서 두 용어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주장한다: “1:27에서 ‘형상’만으로 26절의 의미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며 5:1에서 모양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같은 맥락에서 메튜스는 창세기 1:26과 5:3에서 “형상”과 “모양”이 교대로 사용된다는 점을 언급하여 그 둘은 사실상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1:27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beṣalmēnû kidmûtēnû)
창세기 5:3 “그(아담)의 모양을 따라 그의 형상대로”(bidemûtô keṣalmô)
위의 해석 중에서 프리젠과 메튜스의 것이 가장 창세기의 의도에 부합되는 것 같다. 최근 젠트리(P. J. Gentry)와 벨럼(S. J. Wellum)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이들은 고대 근동의 왕들이 신의 “모양”(demût)으로 불리기도 하며, 이때 “모양”은 신과의 관계에서 왕이 가지는 “아들 신분”(sonship)을 나타낸다는 점에 주목한다. 가령 동부 시리아에서 발굴된 비문(the Tell Fakhariyeh inscription, 주전 10~9 세기)에서 “‘모양’이란 말은 신에게 예배하고 기도하는 왕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아들 신분을 전달한다.” 창세기 1:26-28에서 인간은 피조물을 상대로 왕의 위치에 있는 존재로 소개되기에 젠트리와 벨럼의 설명은 더욱 힘을 얻는다. 사실 많은 구약학자들은 창세기의 인간 이해가 고대 근동의 문화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들은 창세기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고대 근동의 경우 왕이나 지배자에게 신의 형상 또는 아들 신분을 돌리는 반면 구약성경은 인류 일반에게 그렇게 한다. 이른바 왕 또는 아들 신분의 “민주화”(democratization)로 일컬어지는 내용이다. 하지만 굳이 고대 근동의 자료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형상” 또는 “모양”과 “아들 신분”(sonship)의 연결은 가능하며, 이는 성경 자체가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먼저 창세기 5:1-3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본문은 창세기 1:26-28과 함께 인간이 원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들의 신분과 지위를 갖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대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사역)
여기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일과 아담이 아들을 낳는 일이 서로 유비 관계에 놓인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아담을 지으셨듯이 아담 또한 “자기의 모양대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아들을 낳았다. 이는 형상 또는 모양을 아버지-아들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양과 형상을 가진 존재이다. 신약의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이 관점을 그대로 반영한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족보를 역추적하다가 마침내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 3:38)는 말로써 전체를 마무리한다. 이것을 주목하고 골즈워디(G. Goldsworthy)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경을 시작하는 곳에서 아담과 하와가 분명하게 하나님의 “아들” 또는 “자녀”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담과 하와는 분명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들의 위치에 오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우리가 보았듯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것은 인간의 존엄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피조물에 지배권을 행사하는 인간의 역할을 지시한다. 이 역할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반영한다.
화란의 구약신학자 프리젠(Th. C. Vriezen) 역시 비슷한 설명을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와 동일한 내적 관계를 의도한다. 창세기 5:3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곳에서 아담의 아들 셋에 대해 아버지의 모양과 형상이라고 말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형상과 모양이란 표현은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 차이를 드러내며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결속(verbondenheid)을 드러낸다.
정리하면,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신적인 존재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부정하는 신론이나 인간론은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인간과 하나님의 긴밀하고 특별한 관계를 가르친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자신의 제한성과 유한성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는 곧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활동하심이 나타나고 표현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가르(W. R. Garr)는 인간이 곧 “신현”(theophany)이라고 하였다. 다소 과한 말인 것 같으나, 실로 인간을 통해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활동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닌 인간에게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역할이 부여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시 8편 참조). 인간의 제왕적 활동(정복과 다스림)은 하나님의 제왕적 통치의 방편이자 연장이다. “부왕”(vice-regent) 또는 청지기(steward)는 이런 인간의 위치와 역할을 가장 잘 표현하는 명칭이다. 성경의 첫 부분에 인간의 창조에 대한 기록에서 이런 내용이 소개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경의 주된 관심이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왕국의 건설에 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