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땅에 단비를] 내 손에 거룩한 흙을 묻힌다_박상준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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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 거룩한 흙을 묻힌다

박상준 일꾼(인도네시아)

열매를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햇볕의 은혜도 꼭 입어야 한다

행복이란 때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고 그것들과 소통하기 시작할 때에 한 가닥 솟아난다. 세계적인 전염병 유행으로 밖에 나다니는 것이 수월치 않은 요즘, 나는 집 앞 잔디밭 한 귀퉁이에 채소를 심고 그것들과 소통하면서 그런 행복을 누리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채소를 먼저 심어보고 싶었다. 한국에서 사 온 열무 씨가 나의 손에서 흙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는가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귀여운 싹이 올라오는 것을 본 순간 그 탄생의 신기함에 나의 미소도 덩달아 솟아났다. 그런데, 열무가 점점 자라면서 풋풋한 내음을 안겨 주던 어느 날, 열무 잎이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민달팽이가 그 어린 열무잎들을 갉아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군가 자기 살을 떼어 먹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열무를 대신해서 나는 가차 없이 민달팽이의 생명을 짓밟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아름 열무를 내 손으로 첫 수확하여 가슴에 안았을 때, 아!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사기도 쉽고 먹기도 쉬운 반찬 중에 하나가 오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땅에 심고 자라기까지 기다렸다가 내 손으로 손수 따서 먹어보기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거친 땅에 심었건만 오이는 쑥쑥 자라났다. 한 1 미터쯤 자랐을까 어느 날 오이는 노오란 꽃을 피웠다. 그 노란 오이꽃들을 보는 기쁨은 마치 자신의 갓난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방긋방긋 웃을 때 맛보는 엄마 아빠의 행복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꽃이 시들자마자 꽃 뒤에 달린 오이가 자라기 시작했다. 길이가 어림잡아 10 센티미터쯤 되었을 때 살도 통통하기에 얼른 따서 선뜻 아내에게 먹어보라고 건넸다. 아내의 얼굴이 밝아졌다. 갓 따낸 그 오이를 나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와아 그 싱싱함이란 시장에서 산 그 어느 오이의 맛과도 견줄 수 없는 부드러운 싱싱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뒤에도 계속 오이꽃이 피고 오이가 맺히곤 하는데 그 오이들이 커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꽃이 시든지 얼마 되지 않아 갓난아기 새끼 손가락만한 그 오이도 함께 말라 죽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거름이 부족해서인가 거름도 주어보았으나 여전히 오이는 더 이상 자라지를 않고 삭아 떨어지곤 했다. 노오란 오이꽃은 하루에도 세 개 네 개 계속 피어났다. 하지만, 오이꽃 뒤에 달려 있던 새끼 오이는 2센티 남짓 자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나자마자 자기도 스르르 말라 죽는 것이었다. 오이 줄기와 잎은 무성할 대로 무성해졌다. 만들어 놓은 거치대를 여기저기 휘감고 계속 뻗어나가면서 존재를 과시했다. 그런데 열매가 더 이상 크지를 못하는 가녀린 아픔을 내 어이 알 수 있으랴?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 본 형님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수정이 안 되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수꽃을 따다가 암꽃에 뿌려주라고 했다. 오이의 수꽃은 꽃 뒤에 오이 모양 없이 꽃만 있는 것이란다.

그런데 내가 심은  그 오이는 왜 모조리 암꽃뿐이었을까? 오이와 함께 작두콩이라는 채소도 같은 곳에 심었는데 오이 넝쿨보다 작두콩 넝쿨이 훨씬 더 무성한 나머지 오이가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수꽃이 생기지 못한 것임을 안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홀로 외롭게 늙어가던 오이 줄기가 내 곁을 떠난 뒤였다. 생명의 조화는, 아니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는 땅에 심고 물만 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충분한 햇볕의 은혜도 꼭 입게 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 앞에 부끄러운 나의 고개가 떨궈졌다. 

몸에 좋다는 토마토도 심어보았다. 토마토 역시 쑥쑥 자라는 식물이었다. 그 또한 아주 작고 노란 꽃을 피웠다. 토마토가 잘 자랄 수 있는 지지대를 토마토 옆에 설치해 주었다. 그 지지대에 의지하여 계속 자라나던 토마토가 어느 날 콩알만한 크기의 열매를 맺었다. 그것도 네 개나! 그 토마토 열매가 점점 커지는 것이 얼마나 예쁘든지 가까이 다가가 사랑의 눈길로 쓰다듬어주곤 했다. 토마토 역시 내가 다가갈 때마다 짙은 향기를 내뿜어 주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토마토 잎에 병이 들기 시작했다. 갈색점무늬병이라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약을 쳐주어도 푸르던 잎이 계속 갈색으로 변해가더니 결국 말라 죽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친 약은 흰가루병을 제거하는 약이었고, 토마토 잎에 생긴 갈색무늬병에는 적합하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그것도 모르고 맥없이 말라 죽어가는 토마토 잎을 바라보는 나의 멍든 마음은 토마토 잎들만큼이나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듯했다.

병들어 말라가는 토마토를 바라보면서 다른 토마토 씨앗을 심었다. 그 생명도 잘 자라주었다. 약 20센티미터쯤 자라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어린 토마토를 보면서 너는 병들지 말라고 볼 때마다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앞 집 새끼 고양이들이 바깥나들이를 하였는데, 그 중 한 마리가 나에게 다가와 자기를 사랑해 달라고 졸졸 따라다녔다. 너는 너의 주인이 따로 있으니까 가라 해도 이놈이 가지를 않는 거였다. 내가 자기보다 토마토를 더 사랑해 주는 것을 그놈도 알았는지, 아니면 자기도 좀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기 위해서인지, 갑자기 화분 속의 어린 토마토를 깔아뭉개고 내 앞에서 넙죽 엎드리며 애교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자기를 사랑해 달라는 눈짓과 몸짓을 하는 고양이에게 어린 토마토 대궁 정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나보다.

내가 그 고양이에게 눈짓 하나 제대로 주지 않았던 것처럼 고양이도 토마토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나는 그 새끼 고양이의 몸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토마토 대궁이 뿌리 바로 위에서 툭 하고 부러지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거의 동시에 원망 섞인 비명의 소리가 나의 손을 통해 철없는 고양이의 등짝으로 꽂히고야 말았다. 목이 부러진 토마토는 내가 아무리 다시 흙으로 덮어주고 물을 뿌려주어도 결국 회생하지를 못했다. 또 배웠다, 사랑은 방향이 중요하다는 걸! 너의 사랑과 나의 사랑이 서로 어긋나다 보면 애꿎은 다른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그놈의 고양이는 그러나 말거나 여전히 천방지축으로 지금도 내 앞에서 돌아다니고 있다.

벌레와 짐승의 공격을 피해 옥상에 나무로 상자를 만들고 거기에 흙을 퍼다 담았다. 그리고 호박을 심었다. 싹이 나고 쑥쑥 자랐다. 꽃도 잘 피워냈다. 잎이 얼마나 큰 지 호박도 엄청 크게 달릴 줄 알았다. 그런데 호박도 오이처럼 말라죽고 말았다. 더 이상 꽃도 피어내지를 않았다. 햇볕도 좋았건만, 거름도 넉넉했건만…… 결국 땅이 깊지 않은 연고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 나는 인간의 무력함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비록 공격이 있어도 땅이 깊다면, 햇볕이 충분하다면, 그리고 나의 사랑이 변함없다면 열매는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도 나도 입과 코를 가려 말하기도, 숨쉬기도 수월치 않은 요즘, 흙과 흙에서 나온 식물들은 나의 삶에 작은 생기를 불어넣는다. 때로 쓰라리고 속이 타들어가지만, 나는 내 손이 닿는 그 생명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다시 내 손에 거칠지만 거룩한 흙을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