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교회사 이야기 10] 영국 종교개혁과 청교도 이야기_안상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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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종교개혁과 청교도 이야기

안상혁 교수 (합신 역사신학)

 

많은 연구자들은 영국 튜더 왕조에 의해 수행된 종교정책과 더불어 영국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튜더 왕조의 헨리 8세가 수장법(Acts of Supremacy, 1534)을 발표한 이후 영국은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에 합류합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에드워드6세(재위, 1547-1553)의 짧은 통치와 메리 여왕(재위, 1553-1558)의 박해기, 그리고 엘리자베스1세(재위, 1558-1603)의 중용정책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침(浮沈)을 경험했습니다.

헨리 8세의 세 자녀들은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개혁교회의 성장에 기여했습니다. 먼저 종교개혁 신앙을 수용한 에드워드 6세의 짧은 통치기간 중 청교도는 대륙의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개혁주의 신앙을 영국 땅에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약 6년 반 동안 통치한 메리 여왕은 캐서린의 딸로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메리는 개신교를 박해했습니다. 사적인 원한도 작용했으리라 봅니다. 캐서린의 이혼을 추진했던 토마스 크랜머는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크랜머는 화염 속에 자신의 오른손을 스스로 내밀었습니다. 여왕의 위협에 굴복해서 일순간 개신교 신앙을 부인하는 데 사용한 오른손을 스스로 태우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고 합니다. 크랜머 외에도 약 300명의 개신교도가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800여명이 국외로 망명했습니다. 이 때문에 메리는 “피의 여왕”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메리의 박해는 오히려 개신교회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습니다. 순교자들이 영웅으로 추앙받으면서 종교개혁의 신앙이 영국인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메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앤 볼린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해외로 망명했던 청교도는 큰 기대를 안고 귀국했습니다. 실망스럽게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국교회의 이름으로 가톨릭뿐만 아니라 청교도 운동 역시 탄압했습니다.

정부에 의해 추진된 종교정책은, 영국의 개혁가들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미신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미완의 개혁이었습니다. 일례로 1559년의 공동기도서는 여전히 중백의(surplice) 착용, 세례 예식에서의 성호 긋기 등을 허락했고, 성만찬 때 무릎을 꿇는 행위가 화체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검정색 지시문”(Black Rubric, 1552년 공동기도서)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17세기 교회사가 토머스 풀러의 『브리튼의 교회 역사』 (1655)에 따르면, “퓨리탄(청교도)”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1564년입니다. 한편 윌리엄 할러는,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정책을 비판하고 교정을 요구하기 위해 1572년 영국의 개혁가들이 의회에 제출한 “의회를 향한 권고문”이 영국 청교도 운동의 주요한 기점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권고문”은 로마 가톨릭의 모든 잔재를 제거하고 오직 명시적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에 따라 영국 교회와 예배를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그들을 비하하는 의미에서 “퓨리턴”이라고 불렀습니다.

더 이상 정부의 힘에 의존한 교회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교회 지도자들은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그 결과 청교도의 “설교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외면적 제도를 바꿀 수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교구민에게 직접 전하는 일에 전력함을 통해 내면의 개혁을 먼저 이루어내자는 것이 설교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이 시기의 특징적 변화를 가리켜 “경건주의적 전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새로운 정권에 대한 가장 큰 실망이 오히려 종교개혁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개혁운동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한 셈입니다.

약 반 세기 이상 지속된 말씀 운동으로 착실하게 내공을 다진 영국의 청교도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종교개혁의 역사에 기여합니다. 첫째는 청교도 운동이 해외로 확장된 것입니다. 1630년대에 이르면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일부 그룹은 이들이 꿈 꾸어왔던 이상적인 교회를 자신들의 힘으로 직접 건립하기 위해 뉴잉글랜드로 건너갑니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을 탄생시킨 첫 걸음이 되었습니다. 둘째, 1640년대에 청교도 운동은 영국 내에서 청교도 혁명을 낳았습니다. 특히 영국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언약도 사이에 연대가 이루어졌다는 면에서도 큰 의의가 있습니다. 청교도 혁명 기간 중 청교도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소집합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5년 반 이상 지속되었으며 총 1163회의 회의를 거쳐 다음 네 가지의 표준문서를 마련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1645년), 웨스트민스터 장로회 교회 정치규범(1645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6년),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1648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주요한 신학적 주제들은 물론 예배와 교회정치 전반에 걸친 광범한 주제를 성경과 개혁신학의 노선에 따라 집대성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16세기 종교개혁이 한 세기 동안 성장한 후에 아름답게 열매 맺은 개혁파 종교개혁의 꽃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17세기 중엽 청교도 혁명기에 이르러 영국 교회는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리처드 백스터는, 1656년에 출판된 그의 『참된 목자』.에서 그가 몸소 체험하고 있는 감격적인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현재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건국 이래 오늘날과 같이 능력 있고 신실한 목회자를 소유한 적인 없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지난 12년간의 변화는 참으로 위대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에게 있어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것은 분명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들 중 하나입니다. 한 때 커다란 어둠 속에 살았던 회중들 가운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회중들이 분명하게 가르침을 받고 또한 얼마나 자주 그러한 교육을 받게 되었는지요! 또한 과거에 비해 한 지역 안에도 능력 있고 신실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졌는지요!

 

백스터가 목격한 “능력 있고 신실한” 목회자들과 진리 말씀으로 잘 교육받은 회중이 큰 규모로 등장한 것은 사실상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16세기 후반에 시작되었고, 이후 반세기 이상 꾸준히 지속되어온 설교운동이 낳은 열매였습니다. 정부 주도의 교회개혁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좌절하기보다는 한편으로는 주어진 고난을 감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의 보다 본질적인 사역에 헌신했던 개혁가들이 추구했던 바가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영국 청교도의 기도가 그토록 오랜 기간 응답되지 않고 지연되었던 이유를 하나님의 섭리의 시각에서 조명해 보는 것이 의미 있습니다. 그토록 긴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청교도는 국내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작성할 만큼의 신학적인 성숙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국외에서는 새로운 대륙에서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충분한 실력을 갖춘 신앙의 거장들로 성장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