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교회사 이야기 9] 종교개혁이 발견한 소명론_안상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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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이 발견한 소명론

안상혁 교수 (합신 역사신학)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적 소명론은 청교도에게 이르고 역사적 중대 변화를 이끌었다

신자의 소명

종교개혁이 낳은 선한 열매 가운데 하나는 성경적인 소명론이 확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소명이라는 단어가 오로지 성직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자신의 직업과 소명을 통해 동일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창세기 37장 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을 오로지 수도원에게 제한시켜버렸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은 양떼를 돌보고 밭에서 일하며 염소와 암소의 젖을 짜는 것과 같은 가사가 속된 것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황주의자들은 결혼과 가사 노동을 이런 식으로 간주하지만, 유모가 아기를 먹이고 씻기며 돌보는 일과 같은 이 모든 일들을 만드신 장본인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한 일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이들이게 독신의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삶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과 일상의 생활을 속된 것으로 정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루터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중세 교회의 오류는 성경과 무관한 성직주의와 수도원주의를 마치 고차원적인 헌신과 소명으로 거짓 포장하여 가르친 것입니다. 그 결과 비성경적인 성속이원론이 교회와 사회에 확산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우리의 소명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세례요한과 그리스도는 모두 광야로부터 나와 세상을 향해 가르치고 설교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칼빈 또한 신자가 세상의 직업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창세기 41장에서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직을 성실하게 수행한 것을 칭찬하며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해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임무를 최대한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감당했습니다. 다른 이를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부담스러운 일을 직접 감당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 이야기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은 청교도의 소명론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청교도 소명신학의 전통은 19세기 영국 사회를 노예무역의 악한 죄로부터 개혁한 신실한 정치인 윌버포스의 삶 속에서 아름답게 예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759년 윌버포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명문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21세의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가졌는데 영국의회의 유명한 재상 윌리엄 피트는 말하길 “윌버포스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탁월한 웅변가다”라고 극찬했습니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그는 25세 때 회심을 합니다. 곧 이어 윌버포스는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주인공인 존 뉴턴 목사님과 다른 신앙의 동역자들은 그에게 정치계에 남아 그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권유합니다.

결국 윌버포스가 선택한 길은 바로 ‘노예제 폐지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이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경제의 약 1/4에서 1/3이 노예무역이나 노예노동 혹은 노예제와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윌버포스는 노예제 폐지 운동을 하는 동안 노예제를 찬성하는 무리들로부터 매국노라고 비난을 받았으며, 두 번이나 테러를 당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위협과 반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대중연설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대중 계몽운동, 노예노동을 통해 생산된 설탕 불매운동, 그리고 탄원서 제출운동 등의 방식을 통한 대중여론 조성과 책자 출판을 통해 노예제도 폐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법안 제출을 시도하여 마침내 1807년 1월 2일의 법안 통과를 이끌어 내 ‘노예매매 금지법’을 제정하는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을 성취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노예가 된 사람들의 신분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윌버포스는 노예해방을 위해 나머지의 삶을 헌신합니다. 결국 25년의 세월이 흐른 후 윌버포스 사망 한 달 전 1833년 8월 28일에 노예해방이 법제화 되었고 1834년 8월 1일에 전세계 영국령에서 시행되었습니다.

그 날의 감격에 대해 브레디라는 역사가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7월 31일 밤에 식민지 전 지역에서는 교회와 채플(비국교도들의 교회당)의 문들이 모두 열려졌고, 노예들이 그 안으로 몰려들어 대만원을 이루었다. 자정이 다가오자 그들은 무릎을 꿇고 그 장엄한 순간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교회당의 시계가 12시를 알리는 첫 종소리를 울리자 그들은 뛰쳐 일어나 쇠사슬이 벗겨지고 노예에서 해방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기쁨의 함성을 울려 댔다”(England, 1938).

이 승리는 세계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커플란드는 말하길, “1834년 7월 31일 밤 12시 정각을 기하여 약 800,000 명의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아프리카나 영국 역사상의 한 중요한 사건 이상의 일이었다. 그것은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다”(Wilberforce, 1968). 결국 영국은 다른 나라들에 앞서 노예제를 폐지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으로부터 출발하여 윌버포스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소명론이 낳은 변화를 바라볼 때,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만물로부터 영광을 취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