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특집 논단] 주일학교가 환골탈태해야 교회가 산다_양승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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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가 환골탈태해야 교회가 산다

양승헌 목사(세대로교회, 파이디온선교회 설립자, 교육학박사)

 

믿음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붙잡혀지는 것이라면, 주일학교는 붙잡을 믿음이 있는 영적 성장 환경으로 리모델링돼야

 

환골탈태(換骨奪胎)란 뼈대를 바꾸고 태를 바꾸어 쓴다는 뜻으로 낡은 제도나 관습 따위를 고쳐 모습이나 상태가 새롭게 바뀌는 것을 말한다. 지금이 바로 주일학교가 환골탈태해야 할 바로 그 때다. 코로나19 사태로 1년이 넘도록 교회 교육은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아이들은 이미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전통적인 신앙 습관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 19는 다음세대 교육의 큰 위기를 가져왔다. 이전의 주일학교로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슬퍼하고 탄식해야 할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우리의 다음세대 신앙 교육을 근본부터 성찰해볼 기회를 주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는 별 평가도 반성도 없이 유지해온 주일학교 교육의 본질적인 구조가 갖는 문제를 보게 되었다. 다음세대 양육의 바른 틀이 필요하다는 각성을 가져다 주었다. 주일학교는 다음세대 신앙 양육의 목적과 기능을 바로 담을 새로운 형식과 구조로 환골탈태 되어야 한다.

사실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부터 한국교회는 심각한 영적 흉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흉년이 들면 세가지 위기가 찾아온다. 첫째는 양적 위기-소출의 감소, 둘째는 질적 위기-함량미달의 곡식의 품질, 셋째는 지속의 위기–다음해 농사를 이어갈 충실한 종자 확보의 어려움이다. 영적인 흉년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이미 한국교회 주일학교에 양적 변화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교단 외에는 총회에서 그런 문제가 문제거리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기독교 학교 교육연구소 박상진 교수는 한국 교회 48%에서 주일학교가 없어졌다고 보고했고, 이 추세는 더 심해 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가정 친화적 교회 교육의 방안 강의안, 2017).

그러한 양적 위기의 원인은 저출산, 탈종교화 등 사회적 원인에서 보다는, 가정과 교회의 신앙 교육적 기능의 약화 내지 무능의 원인에서 기인함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흉년의 위기에서 양적 감소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질적인 악화라고 말할 수 있다. 형식주의 종교생활 속에서 더 현세적이고, 더 개인주의 적이고, 더 자기중심적인 신앙이 한국교회에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다. 그러한 가나안 2세대 같은 이 시대 부모 세대의 신앙생활은 우리 교회의 계대 단절의 위기 혹은 열성계대(劣性系代)의 위기를 불러오고 말았다. 우리 아이들의 성경 진리와 바른 교리에 대한 영적 문맹 수준이 염려스럽다.

신천지에 한국교회가 휘둘리는 자존심 상하는 모습이 뭘 말해 주는가? 부모와 아이들에게 주일날 학원 공부는 교회의 예배보다 중요한 우선순위가 되어서, “주일날 학원 보내지 않기 운동”을 벌여야 할 지경이 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렇게 자란 우리의 다음 세대가 과연 한국교회의 내일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렇게 힘도 가치도 잃어버린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내일을 위협하는 내부적 문제가 될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주일학교가 환골탈태해야 교회가 산다. 어떻게 주일학교를 환골탈태의 수준으로 뜯어 고쳐야 할까?

 

첫째는, 주일학교에 대한 고정관념과 그릇된 확신을 깨야 한다.

한국교회 다음 세대들이 교회를 빠져나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정이 신앙 양육의 책임을 주일학교에 이양하도록 유도한 데 있다. 주일학교는 다음세대들의 영적 성장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1970~80년대 한국교회 부흥기에 교회로 몰려들어오는 아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그들을 성경으로 양육하는데 소중히 쓰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주일학교가 다음세대 영적 양육의 중심에 놓이도록 주일학교를 강화하고 강조하면서, (전혀 의도하지 않게) 교회는 다음세대 양육을 발목 잡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다.

주일학교는 한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반듯한 제자로 빚어지는 본질적인 목적과 기능을 서서히 잃어가면서, 개교회 부흥과 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 일이 의식도 못하게 진행되었다. 부모들을 끌어들이고, 다른 교회로 옮겨가지 않도록 주저앉히기 위한 도구적 기능을 하도록 더 큰 교육관, 더 좋은 교육 사역자, 더 현대화된 교육 설비들을 구비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로 말미암아,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이루어지고 교회 간의 경쟁이 심해지고 지교회 주의가 강화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크리스천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한 영적 양육의 책임을 주일학교에 양도해 버리게 된 일이다. 많은 부모들은 좋은 학원에 가면 성적이 오르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익숙한 세상 공식으로 자녀들의 신앙 양육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좋은 교회 좋은 주일학교에 출석시킴으로써 아이가 믿음의 사람으로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며 교회를 옮겨 다니기까지 한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지 싫어하는지 그들의 기호와 선택으로 그들이 소속이 되어야할 교회를 결정하기도 한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이들을 매주 교회학교에 데려다 놓고, 다시 집으로 데려가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주일학교는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키울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다. 그 출생이 그렇고 그 본질이 그렇다. 주일학교는 예수님이 만든 기관이 아니다. 1750년경 영국의 로버트 레익스(Robert Raikes)가 산업혁명의 후유증으로 인해 버려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만든 사회적 기관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와 교회 확장의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교회 안에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고, 그래서 선교사들의 손에 들려 우리에게까지 이른 기관이다. 주일학교는 교회의 교육적 기능을 위해 교회가 입양한 기관이다. 그러나 “주일학교”라는 태생적 구조는 문제는 그를 입양한 교회 공동체에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주일학교는 신앙 공동체를 학교로 바꾸어 놓았고, 다음세대를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주일학생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구조를 바꿔 ‘학교’로 만들면서 다음세대 신앙 교육이 달라져버렸다. 다음세대 양육의 목표도 방법도 과정도 실제도 다 달라지고 말았다. 목사는 교장이 되고, 이들을 영적 성숙으로 이끌어야 할 교사들은 공과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아이들의 입맛과 눈높이에 맞는 교과 과정을 만들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야 하는 목적은 성경 지식을 가르치는 목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이들 세대와 어른 세대는 예배부터 양육까지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구별되었다. 목회는 목사님이 하고 교육은 교육전도사가 맞는 목회와 교육 간의 분리가 일어났다. 신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전도사로 호칭이 바뀐 지도자는 훈련도 준비도 없이 우리의 다음세대 교육을 이끌었다. 전도사만 바뀌면 예배 형식도, 교육 목표도, 공과책도 다 바뀌는 교육적 사사 시대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임상 대상으로 활용이 된 세대가 교회에 염증을 느끼며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존 웨스터 호프는 1960년대 이미 주일학교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주일학교가 다음세대 신앙 양육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을 60년이 지난 오늘에야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존 웨스터 호프는 다음 세대가 우리의 믿음을 대물림하기 위해서는 주일학교가 아닌 ‘신앙공동체’ 안에서 자라야 함을 강조했다. 평생을 어린이 사역자로 살아오면서, 특히 지난 18년 다음 세대가 건강한 믿음으로 자랄 교육 생태계로서 교육목회를 해오면서, 그것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믿음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붙잡혀지는 것이라면, 주일학교는 붙잡을 믿음이 있는 영적 성장 환경으로 리모델링 되어야 한다.

 

둘째는, 가정을 신앙 교육의 1번지 장으로 회복해야 한다.

현재 우리 교회들의 기독교 교육의 실상은 외 손 손뼉치기로 비유할 수 있다. 한 손으로는 아무리 휘둘러본대도 힘만 들고 박수 소리는 내지 못한다. 점점 쇠약해 가는 교회의 교육적 기능을 붙들고 현장의 사역자들이 몸부림을 하고 있지만 별 진전이 없는 이유는 손바닥의 다른 면, 많은 부모가 기독교 교육의 책임을 교회에 넘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히브리 민족의 교육에서 우리 초대교회 교육에 이르기까지 부모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녀 교육의 제1번지 에이전트이다. 부모 밑에서 역사의 한 시대가 자란다.

한 사람의 사람됨, 그 성품과 인격과 가치의 나무꼴이 가정에서 다 잡혀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육체적, 지성적, 정서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 체질과 체형이 빚어지는 작업이 부모의 손에 놓여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건강한 사회 살맛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 구체적으로는 교회 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우리 교회가 제일 먼저 서둘러야할 일은 부모에게 자녀의 신앙 양육에 대한 책임을 돌려주는 것이다. 한국 교회 주일학교 역사 상 가장 왕성한 기독교 교육적 열매와 능력이 나타났던 시기는 사경회와 장년성경공부로 부모들의 의식과 삶이 말씀에 사로잡혔던 때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믿음의 가정 모든 크리스천 부모에게 그렇게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할 준비나 역량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주일학교 학생들이 믿는 집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신앙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면 할 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와 교회의 다음세대 사역의 중요성은 갑절이나 강조될 수 밖에 없다. 교회는 제2의 가정, 주일학교 교사는 제2의 부모로서의 소중한 책임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도외시한 교회 교육이 외손 손뼉치기이듯, 교회를 떠난 부모의 신앙양육도 마찬가지다. 참 신앙의 대물림은 가정과 교회의 협력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교회의 진리라는 노란색 에너지와 가정의 사랑이라는 빨간색 에너지가 합쳐진 오렌지 에너지를 창출될 때 어린이 사역은 그 열매를 확실하게 거둘 수 있다. 레지 조이너는 그의 책 ‘싱크 오렌지 (Think Orange)’에서 이러한 원리를 색깔로 설명하고 있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가르침을 빨간색으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진리의 가르침을 노란색으로 표현한다면, 두 색깔의 합성색인 오렌지색으로 나타날 양육 환경이 조성될 때 가장 효과적으로 믿음이 대물림 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레지 조이너, 오렌지. 도서출판 디모데, 2011. p. 89).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부모보다 아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교회 보다 부모에게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기관은 없다

●교회가 부모와 손잡을 때 아이에 영향을 미치는 교회의 잠재력은 극대화된다

●부모가 교회와 손잡을 때 아이에 영향을 미치는 부모의 잠재력은 극대화된다

●그러나 부모 교육이 이루어지는 교회가 별로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신앙 양육의 기능과 책임을 가정으로 밀어 넣게 만들었다. 당황하고 있는 것은 준비되지 않은 교회나 부모들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코로나19는 다음세대 신앙 앙육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교회는 부모를 1번지 책임자로 세울 구체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 설교로, 글로, 온라인 오프라인 강의를 통해서, 간증을 통해서 부모들의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교회 중심 교육을 가정으로 변환하는 양육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 믿지 않거나 믿음이 약한 부모를 보충하기 위해 교회의 성숙한 성인교인들과 그 아이들을 매칭하는 영적 부모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크리스천 가정의 특성과 원리, 자녀 교육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 자녀의 성장 계절에 따른 부모역할, 성교육-가치관 교육-개인경제교육등 이슈를 다루어 주는 훈련 과정들이 개설 되어야 한다. 각 연령 그룹 부서는 눈 앞에 보이는 아이들 뿐 아니라 그 부모와 가정을 그 사역의 범주와 대상으로 확장해야 한다. 주일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도록 부모들을 연장선으로 활용할 가정 연계 활동등을 제공해야 한다.

 

셋째는, 아이들을 주일 학생이 아닌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 키워야 한다.

정말 믿음의 스토리를 다음 세대에게 대물림 하려면, 교육과 목회, 교회와 가정의 분리의 틀을 깰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 와 장년의 분리된 우리 교회 문화의 틀도 깨어야 한다. 우리 다음 세대들이 다른 공간 다른 시간 다른 집단으로 구별된 주일학교에서 자라게 한 것은 그들 눈 높이에 맞는 신앙 양육을 효과적으로 하려는 선한 의도였다. 그러나, 그 구별이 이들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분리하는 전혀 의도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교회 공동체의 영광과 축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자라고 있다. 아이들은 그들이 속한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끈끈한 사랑의 공동체인지를 맛볼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들은 교회의 2등급 교인일 뿐이다. 그들은 그저 일주일에 한시간 모이는 다른 종류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일 뿐이다. 이것이 주일학교 한 부서를 마치고 올라갈 때마다 많은 아이들이 떨어져 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영광과 책임을 경험하도록 가능한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한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면 가족들의 시간, 공간, 관심사, 우선순위가 아이를 중심으로 모두 조정된다. 아이는 가족의 중심에서 사랑과 관심 속에 자라가면서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책임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의 가정인 교회도 그래야 한다. 그들이 교회 공동체 중심에서 양육되도록 받아 들여야 한다. 공동체 예배, 공동체 교제, 공동체 전도, 공동체 봉사 등 교회 공동체의 모든 일은 그들의 일이기도 해야 한다. 그들은 각 연령 그룹의 핵심 그룹이 되어 공동체에 대한 애정 어린 주인 교인이 된다.

많은 목회자들은 주일학교를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이들 숫자가 적은 것을 두고 마음 답답해한다. 아니다. 한국 교회의 70% 이상은 전교인 100명 미만의 작은 교회이고, 작은 교회 숫자는 계속 늘어나게 될 것 같다. 이들 교회 대부분은 주일학교를 따로 가질 수 없는 형편이 될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위험이 아닌 기회로 본다. 작은 교회일수록 온 교회가 모든 아이들 이름을 다 알고 사랑하고 기도해 줄 수 있고, 성장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유리한 구조를 갖고 있다. 가정과 교회를, 목회와 교육을, 세대와 세대를 통합할 최적화된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작은 교회일수록 담임목사의 다음세대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목회적 돌봄과 축복이 더 직접적인 장점을 갖는다. 담임 목사의 교육적 시각과 소신이 훨씬 용이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다음 세대와 부모들에게 깊이 스며들어갈 수 있다. 작은 교회일수록 아이들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고, 교회 공동체로부터 받을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격려가 강력하고, 교회 공동체를 섬기면서만 얻을 수 있는 영적 성장의 장이 넓다. 아이들을 주일 학생이 아닌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 키워야 한다.

 

넷째는, 다음세대를 공동체 예배에 통합해야 한다.

아이들이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서 자라게 할 최적의 영적 환경은 공동체 예배다. 예배에는 경배적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육적 요소, 교제적 요소, 봉사적 요소, 전도적 요소 등이 다 들어 있다. 나는 20세에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날 유교도로 살아 왔다. 내가 종교란에 자랑스럽게(?) 유교라고 쓰게 만든 것은 사서 삼경에 대한 지식이나 훈련때문이 아니라, 온 가문이 드리는 모든 제사에 참석하도록 요구 받았고, 참석해온 경험 때문이었다. 빙산의 십분의 구가 물 밑에 떠받치고 있듯이, 부모교육, 주일학교 교육 등 모든 형식적(formal) 교육과정은 공동체라는 무형식(nonformal)이나 비형식(informal) 과정의 지지 위에서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다음 세대 신앙 양육을 위한 가정과 교회의 책임은 물리적 제휴가 아닌 화학적 융합, 비유컨데 합판이 아닌 합금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 옆에서 예배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느낄 기회를 가져야 한다. 부모가 주의 은혜에 눈물로 반응하는 것을 목격하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예배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느낄 수는 있다. 예배는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가슴의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방해를 받거나, 아이들에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어른들의 편이를 위해 아이들을 공동체 예배에서 제외시켰다. 아이들이 눈 높이에 맞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말이다. 주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18:16).

아이들을 공동체 예배에서 제외시킨 결과 주일학교는 전혀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아이들을 공동체의 주변에서 자라도록 떼어 놓는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아이들이 청소년부만 졸업하면 교회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공동체 예배에 들어올 때, 성도들의 불평이나, 설교자의 불편이나, 아이들이 끼치는 어수선함은 우리가 감내해야 할 비용이다. 아이들이 다 떠나고 내일이 없어지는 결과 보다는 훨씬 저렴한 비용이다. 장소가 허락된다면 성탄 주일, 부활주일, 교회 설립 기념 주일, 감사 주일, 해방(통일)주일 예배 같은 절기 예배를 온 세대가 함께 드리면서 자연스럽게 세대 통합 예배로 확장해 갈 수 있다. 장소가 너무 협소하다면, 주일 저녁 예배나 수요 예배부터 온 가족 예배를 시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작은 교회라면, 사랑과 관심과 배려로 아이들을 예배 안에 끌어안기만 하면 된다.

 

위기를 기회로

코로나19는 우리가 봉착한 큰 위험 에너지임에 틀림없다. 이로 인해 교회는 내일을 지속할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코로나 19는 기회 에너지이기도 하다. 몸과 맘으로 교회를 떠나던 다음 세대가 돌아와 더 멋진 믿음의 세대로 서게 될 다음 세대 양육의 방식을 바꿀 기회다. 주일학교의 원래 부여된 기능과 목적인 다음 세대의 영적 성장과 무장을 담아내지 모사는 형식과 구조를 과감히 바꿔야 한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 시스템에서 한 아이 한 아이가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 우리 교회를 이어갈 알곡 성도로 자라가는 것에 방해가 되는 모든 부분에 대해 정직한 평가를 해야 한다.

각 교회 전통과 형편에 따라 그 방식과 범위가 다르겠지만 어쨌든 주일학교를 환골탈태해야 교회가 산다. ‘주일학교’라는 이름이 갖는 함의 때문에 변화가 어렵다면, 이름을 바꿔야 하지도 모른다. 1학년 2학년 3학년 식의 연령에 따른 학급편성을 연령을 섞어 형과 동생, 언니와 동생이 서로 붙드는 가족 그룹으로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가능한 교회라면 다음세대 사역 부서에 가정사역부를 신설해야 할지도 모른다. 크던 작던 교회 공동체 예배, 양육, 교제, 전도, 봉사에 다음세대들이 참여하도록 자리를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어색함과 불편함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은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시대를 위한 주일학교를 리모델링할 기회다. 쭉정이 열 가마니보다는 알곡 한 말을 키워내기 위해 주일학교를 다음세대 교육기관으로 환골탈태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