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는 내 삶의 뒤에서 유유히 흐른다
아무것도 아닌 나의 일상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
고상섭 목사(그 사랑교회)
성경통독을 통해 얻는 가장 큰 유익은 역사에 대한 인식이 변화 되는 것이다. 성경을 통독하면서 인간의 역사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때, 성경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더 이상 인간 등장인물이나, 인간 저자, 그리고 인간 독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성경의 기술방식은 아주 독특하다. 등장인물인 인간들의 대화가 있지만 또 3인칭 성경저자의 시점에서 담담히 사건과 상황을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전지적 작가의 시점인 하나님의 관점에서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 다양하고 복잡한 묘사들을 통해 인간들의 행위가 두드러지게 보이지만 그 인간 역사 뒤에 흐르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된다.
그때가 바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는 때이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단순히 유대인의 시각으로 읽었던 구약성경이 살아 움직이는 말씀의 역사로 다가왔고, 전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했던 하나님의 관점에 대해 눈을 떴기 때문이다.
칸트 이후에 추상적인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공적 영역에서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현재 칸트의 영향아래 살아가는 문화를 공유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물질에 관심을 가지는 물질주의 시대가 되었고, 초자연에 눈뜨지 못하는 물질주의는 결국 하나님을 배제하고 결국 이웃을 배재하는 개인주의로 흐르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두 종류의 역사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 하나는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역사 즉 2021년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 흐르는 성경의 역사 즉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아브라함은 개인의 역사를 살았지만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살았던 사람이며 바울도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에베소에 살고 있지만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로서 새로운 역사를 따라 살 것을 권유했다.
성경읽기를 통해 내가 살아가는 내 삶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약간의 도움을 주는 정도로 생각한다면 성경을 오해하고 왜곡하게 된다. 지금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역사가 내가 목숨을 걸어야 할 진짜 역사가 아니라, 이 역사 속에 흐르는 또 다른 역사 즉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소명’의 순간일 것이다. 단지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 삶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사명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부르심을 깨닫게 된다. 성경의 역사는 성경 속에 갇혀서는 안된다. 아직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극치에 도달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그 하나님의 나라의 과정 속에 살아가고 있다. 결국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도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처럼 ‘말씀에 사로잡히는 경험’이 필요하다. 신앙이란 매료되는 것이며,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래서 존 파이퍼는 자신을 성경에 매료된 포로라고 고백했다. 성경 속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마치 창문 너머 펼쳐진 알프스의 영광에 매료되어 창문에 서성거리듯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수 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처음엔 아브라함의 이야기, 이삭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눈을 뜨면, 그 역사가 내 인생을 덮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역사가 진짜가 아니라 지금도 인간의 역사 뒤쪽에서 흐르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치 누가복음 3장에서 세례자 요한의 등장을 소개할 때, 디배료 황제가 로마를 통치를 하고,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헤롯이 이스라엘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라고 세상 역사의 중심인물들을 나열한다. 요한이 등장할 당시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로마의 통치자도 분봉왕도 종교지도자들도 아니다.
이름 없는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진동된 사가랴의 아들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다. 세계사의 한 줄을 찾아봐도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역사의 한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는 흐르고 있고, 그것이 인생에서 더 중요한 물줄기가 될 때 비로소 인생과 세상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역사의 현실을 부정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으로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새로운 역사에 대해, 새로운 세상에대해,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도 펼쳐지고 있음에 대해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더 깊이 깨달아야 한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현실이며,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더 생생한 현실임을 느끼고 누리는 것이다.
룻기의 룻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외국인 노동자로 낯선 나라에 와서 박스를 주우며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려고 했던 룻은 보아스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죽은 여인이다. 그러나 천국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그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던 시대에서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다윗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나라는 초라해 보이는 내 삶의 작은 일상 뒤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나의 일상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작은 퍼즐조각 같은 인생이지만, 마지막 날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위대한 작품 속에 한 조각이 되어 아름다운 구원의 역사 속에 동참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삶의 뒤편에서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