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정치적 존재가 되자

0
10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정치적 존재가 되자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인본주의적 요소가 더 활개를 치고,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5:16)는 말씀은 멀리 느껴지기만 한다. 이 말씀은 뒤에 이어지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한 바와도 연관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외 없이 정치적 존재가 돼야 한다. 아니면 어느 누구도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또는 어떤 원리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과 같아지는가? 먼저 정치란 무엇인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세상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지, 정치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그 성격에 맞도록 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듯이 성령께서는 자신의 역사를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들이 매우 정치적이 되도록 해 주시기 마련이다. 자신이 내주 하시는 성도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통치를 밝히 깨닫게 해주시고, 깨달은 바에 전적으로 순종하게 하시는 일에 실로 자신의 역량을 모두 쏟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리 하실 때에 교회에 나타나기 마련인 객관적이면서도, 주도적인 현상이 있다. 그것은 말씀의 절대적 권위와 우위의 두드러진 부각이다. 항상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소욕과 반대되는 육체의 일 또는 육체의 소욕을 정의할 때에, 도덕적 가치나 윤리적 척도로서가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데, 곧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의 관점이어야 한다. 이는 사람이란 필연적으로 어느 한쪽의 통치를 선호 하도록 되어 있는 정치적 존재이기 때문인데, 성령의 소욕을 좇는 자이거나 육신의 소욕을 좇는 자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플라톤은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가 무엇인지 아는가?”라고 물은 후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신이 명백히 정치적 존재이면서도 정작 정치를 외면하는 데 따라, 결국 비참한 노예생활을 스스로 자초하게 되는 모순을 질타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일반 세상의 영역에서도 확실하게 적용되고 있는 매우 실제적 상황이지만, 기독교 신앙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는 원리이다.

왜냐면 기독교인이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잘 받들어 나가야 할 매우 정치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도로서는 모름지기 ‘사람의 통치’와 ‘그리스도의 통치’를 명확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철저히 받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의 주체가 되어 전형적으로 육체의 소욕을 좇고,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음으로 죄에게 종노릇 하는 태도로 일관함을 경계해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교회생활을 자행하는가 할 때에, 교회의 정치에 무관심자들, 곧 성령의 소욕을 거스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다. 우리 모두 육체의 일을 멀리하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교회공동체라는 사회 안에서 시종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는 정치적 존재로 자리매김해 나가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가 성령께서는 말씀과 함께 또는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고 신앙 고백하는 것은 다 이런 원리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것들의 상호 관계를 연구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말씀에 맞도록 영위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성령충만한 모습이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모습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모습에 대해 철저한 ‘정치적 존재다’라고 하게 된다.

이렇게 세상에서의 정치적 존재가 교회에서의 정치적인 존재로 뒤바뀌게 된 데서, 성도로서 누리게 된 구원의 증거가 드러난다. 성도인 우리는 모름지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사는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해, 그렇게 말씀에 착념하고 또 착념하는 매우 정치적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새 생명의 정치 현장에 적극 참여해 나가는 데서, 세상의 온갖 부패한 정욕들과는 결별하게 되고, 밝고 순결한 빛의 옷들을 입게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렸고, 함께 무덤에서 부활하였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된 데 따라,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의 지상적 임재방식인 교회에 참여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런 멋진 신자의 인생으로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