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과 역사학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구약성경은 역사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그렇다보니 구약을 읽는 독자들은 구약에 서술된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오늘날에는 역사학과 더불어 고고학이 많이 발전 되었기에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지하게 읽는 독자들에게 이 분야는 늘 흥미를 끄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 역사학이나 고고학에서 나오는 전문 연구들은 물론이고 미디어들에서조차 성경의 역사와 관련된 이슈들이 심심찮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때로 성경독자들은 구약역사와 관련된 이런 저런 내용들을 접할 때 궁금증을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품게 되고 심지어 혼란스럽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기에 구약성경과 역사문제를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소위 역사학자들이나 고고학자들이 밝혀냈다고 하는 역사의 진실들이 말 그대로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역사학자나 고고학자가 자신이 발견하였거나 만난 과거의 흔적들에 대한 “나름”의 관점이나 해석일 뿐이다. 사실 건축물이든, 도자기 파편이든, 무엇이든 오직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의 입을 통하여서만 말할 수 있는 “무언의”(mute) 유물일 뿐이다. 이는 동일한 물건이 관찰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다. 고고학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논쟁들은 이런 문제점을 잘 대변해준다.
따라서 성경독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굳은 신뢰이다. 성경을 떠나 다른 곳에서 성경의 역사를 입증해줄 증거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코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눅 16:31 참조). 모든 역사가가 그러하듯, 성경저자들도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자료를 선별하여 역사를 기록한다. 한마디로 성경은 성경 고유의 방식으로 과거의 역사에 대하여 증언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가나 고고학자의 경우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매우 낯설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독자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성경의 진실성 대한 굳은 신뢰이다. 영원히 변치 않을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성경에서 만난다는 사실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이것은 결코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역사가나 고고학자의 노력에 무관심 하라는 뜻은 아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성경역사의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요소들(Merenptah 비문, Tel Dan 비문, Mesha 비문, Shalmaneser 3세의 Kurkh 비문 등)을 많이 밝혀내었다. 이곳에서 그것들을 다 소개할 필요는 없는 줄로 안다. 다만 성경독자들이 역사와 관련된 문제와 그것을 어떻게 소화해야할지 돕는다는 의미에서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1982-1989년 여덟 차례에 걸쳐 에발 산의 북동쪽 높은 산마루에서 고고학적 발굴이 이뤄졌다. 이 발굴을 주도한 인물은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쩨어탈(A. Zertal)이었다. 쩨어탈에 따르면, 이곳의 두 지층(Stratum I, II)에서 제의적 특징을 보이는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하부 지층(Stratum II)에서 발굴된 구조물에는 다량의 재와 동물 뼈가 들어있었으며, 대략 3 cm 두께의 석회 조각들(20개 정도)도 함께 발견되었다. 또한 상부 지층(Stratum I)에는 다듬지 않은 돌로 지어진 직사각형 모양(9 x 4 m)의 중앙 구조물이 있고, 잘 정돈된 돌들과 다량의 동물 뼈를 포함한 재로 채워져 있었다.
특이한 점은 중앙 구조물에 이중 경사로가 있어서 하나는 꼭대기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주변을 둘러싸는 벽으로 향한다. 연대기적으로 이 두 지층은 각각 주전 13세기 후반부와 주전 12세기 초반부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하부지층(Stratum II)에서 라암세스 2세(Ramesses II, 1304-1237 BC)의 통치 후반기 것으로 추정되는 스카라베와 기하학적 모양을 가진 석인(石印)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두 지층 사이나 상부 지층 끝에 파괴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은 평화롭게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쩨어탈은 이 구조물이 원래 번제단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것은 여호수아가 에발 산에 쌓은 번제단 및 율법을 기록한 돌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곳 제단에 조각상(figurines)이나 율법에서 금지된 동물의 뼈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이 제단과 이스라엘의 밀접한 관련성을 암시한다. 물론 이곳에서 율법에 제사용 짐승으로 언급되지 않은 “다마 사슴”(fallow deer) 뼈가 발견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명기 율법은 사슴을 식용동물에 포함시키고 있다(신 14:5). 이는 이곳에서 발견된 사슴의 뼈가 제사와는 무관하게 식용으로 사용되었던 짐승의 잔재이며, 다만 제단 내부를 채우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에발산의 제단은 여호수아서 8:30-35에 기록된 여호수아의 언약갱신 의식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곳에서 발견된 석회(white plaster) 역시 같은 방향을 지시한다. 여호수아는 에발산의 언약갱신 의식에서 석회를 바른 돌에 율법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신 27:4). 물론 율법이 기록된 돌이 발견된 것은 아니나,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글이 지워졌을 수도 있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주변의 어느 곳에 묻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은 연대기와 관련된 것이다. 쩨어탈이 말한 것처럼 이곳의 제의시설이 라암세스 2세 시대의 것이라면 출애굽과 정복전쟁의 시기를 주전 13세기 후반으로 낮추어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주전 15세기 출애굽을 지시하는 성경 내외의 다른 증거들과 맞지 않는다(삿 11:26; 왕상 6:1 참조). 따라서 나아만(A. Na’aman)이나 마자르(A. Mazar) 등 고고학자들의 견해처럼 이 시설이 제의장소가 아니라 사사 아비멜렉 때에 세겜에 있었던 “엘 브릿 신전”(בית אל ברית ְ삿 9:46)과 관계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문제점은 이곳에 불에 탄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삿 9:49 참조). 하지만 사사기는 “엘 브릿 신전”에 속한 “저장고”(צריחַ) 또는 “세겜 망대”(מגדל־שכם)가 화재로 파괴되었다고 밝힌다(삿 9:49). 그러므로 화재의 흔적은 제의시설 주변의 어딘가 묻혀 있거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에발산의 제의시설이 사사시대의 것일 수 있다는 생각에 여전히 개방적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또 다른 가능성으로 인도한다. 이 제의시설이 다름 아닌 여호수아에게 소급될 가능성이다. 여호수아 시대에 만들어졌던 원래의 제단이 사사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제의 용도로 변경되었을 수 있다. 정복전쟁 당시 길갈에 이어 실로가 제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가운데 에발 산의 제단이 백성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혹은 의도적으로 처음 제의시설(Stratum II)이 땅 속에 묻히고 그 위에 “엘 브릿 신전”과 같은 새로운 시설이 세워졌을 수도 있다. 또한 라암세스 2세의 통치 후반기의 것인 스카라베조차도 연대측정을 위한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쩨어탈도 인정하듯이 그것은 여호수아의 제단이 세워진 후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종교적 타락이 가속화되면서 그곳에 우상숭배의 일환으로 바쳐진 것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쩨어탈은 하부지층(Stratum II)과 상부지층(Stratum I) 사이의 간격도 상당히 클 수 있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연대측정의 기준으로 사용되는 철기시대 1기의 도자기에 대해 현재로서는 충분히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하부지층에서 발견된 최초의 제의시설이 주전 15세기 말이나 14세기 초에 여호수아가 만들었던 에발 산의 제단일 수 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