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경계해야 할 가장 고상한 범죄
< 천한필 목사, 예다임교회 >
“분주한 사역자보다는 주님 앞에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역자이길”
매 주일마다 성도들과 함께 십계명을 묵상하면서 큰 울림과 도전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 한 주간의 내 신앙을 진지하게 반성하며 돌아보게 된다.
요즘 가장 많이 되새기는 내용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제3계명이다. 여기서 ‘망령되게 부른다’는 것은 ‘불필요하게 아무 때나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듯 내세우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한다’는 의미라 볼 수 있겠다. 3계명은 바로 그런 죄악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단지 표면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데서 나오는 경솔함이며, 교만함까지도 주의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에서 나오는 최악의 표현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3계명의 내용을 정면으로 저항했던 대표적인 모습을 우리는 ‘나답과 아비후’의 모습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레위기 8장과 9장에 언급된 것처럼 그들은 아론의 아들로서 다른 두 명의 형제들과 함께 제사장 위임식을 치렀다.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첫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결국 죽었다. 게다가 그들이 죽은 이유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레 10:1).
레위기 8장과 9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가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이와 대조적으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대로’ 제사를 주도한 것이다. 마치 자기들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식의 망령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 결과는 아주 단호했다. ‘죽음’이었다.
나답과 아비후 사건을 보면서 오늘날 설교자는 어떠한 생각을 가져야 할까? ‘혹시 나는 망령됨의 죄악을 설교 중에, 목회 중에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큰 긴장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의 일을 빙자하여 자기 생각과 자기 탐욕을 추구하면서도 함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남용하며, 명분화하려는 죄악을 나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내 중심대로 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은근슬쩍 둘러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설교자들이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가장 고상한 범죄이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어떤 목사가 임직식을 통해 목사 안수를 받고, 그 다음 주일 목사로서 첫 설교를 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설교 좀 했다고 해서 갑자기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로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가장 교묘하면서도 고상한 죄악을 아주 능청스럽게 수없이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를 하면서, 기도를 하면서, 열심히 목회를 하면서, 전도를 하면서, 성도들을 만나 심방하고 가르치고 상담하면서, 그외에 수많은 사역들을 추진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 중심대로 과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며 자신의 고상한 탐욕을 합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누군가에게 멋들어진 설교를 통해 감동과 은혜를 끼치는 것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종으로서 아주 잠시 동안만 쓰임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6-27)는 야고보 사도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오늘도 빡세게 자기 생각대로 분주한 사역자이기보다는 주님 앞에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거룩한 몸부림을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