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총회교직자 수련회 특집| 주의 일에 힘쓰라_박혜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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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일에 힘쓰라 (고전 15:51-58)

< 박혜근 목사, 칼빈대 교수 >

 

<편집자 주 : 5월 11-14일간 ‘은혜의 복음을 회복하라’는 주제로 열린 총회교직자 수련회 주 강사인 박혜근 목사의 설교문을 요약, 게재합니다>

 

“이생에서 내가 행한 일은 없어지지 않고 부활과 함께 모두 드러납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쓰고 그렇게 살면 부끄러운 부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1. 고린도교회는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받은 은사가 많았지만 문제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적방종, 분쟁, 편 나누기, 은사의 남용 등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문제는 더 근본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본 서신을 분석해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대략 열 가지의 문제가 있었는데, 그 원인은 많은 부분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지 않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당면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바울에게 물었기 때문에 본 서신은 그것에 대하여 대답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일종의 신앙생활의 FAQ’s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는 새로운 부분을 시작할 때는 언제나 “대하여는(now concerning, 헬. Peri de)”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7:1, 25; 8:1; 12:1; 16:1). 그런데 15장만큼은 “이제”(de)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15장의 내용은 고린도교회가 질문하지 않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말하자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다루면서 세세하게 답변했지만 사도가 생각할 때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한 가르침은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다수는 모두 부활에 대한 바른 신앙을 요구하는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컨대 여자들이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는 문제의 배후에는 디오니소스(Dionysos) 숭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 숭배는 여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기에 고린도교회의 여신자들 중의 일부는 여전히 이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촉발된 문제 중의 하나가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면서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제의에 참석하는 여자들은 종종 남장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거나 혹은 머리를 짧게 깎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머리카락을 밀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남자들은 여자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 내리고 예배에 참석할 때는 머리에 수건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발굴된 고고학적인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고린도에서 발굴된 한 꽃 병에는 디오니소스 앞에서 머리를 민 여자가 춤을 추는 그림이 새겨져 있습니다(Lewis R. Farnell, Cults and the Greek States, vol. 5 [Oxford, 1896-1909], 275-280). 이렇게 여자들이 디오니소스를 숭배할 때 그들의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거나 짧게 깎거나 혹은 머리를 동여매는 것은 술의 신에 대한 헌신의 표였습니다.

디오니소스가 양성동체였으므로 그것의 숭배자들은 남성과 여성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관념을 가졌고 이런 관념은 여자들이 남장을 하는 일에 그리고 물론 그 반대의 경우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배후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의 여성도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예배에 참석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행동이 이교의 제의에서는 횡행한다고 해도 로마사회의 문화적 규범에 저촉되고 기존질서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같이 행동한 것은 부활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영적인 부활을 믿은 그들로서는 이미 부활을 했으므로 이제는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고 따라서 복식에 관한 기존의 질서에 더 이상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게 되면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천사와 같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마 22:30; 눅 20:35).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부활을 거치고 천사와 같이 되었으므로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남녀를 구분하는 복식규정을 비롯한 사회적 규범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에게 여러 가지 실천적인 질문을 했지만 그들이 당면한 문제와 관련해서 정작 물었어야 했던 것은 육체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묻지도 않았지만 15장에서 부활에 관하여 장황하게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1.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하나는 육체의 부활입니다.

 

육체의 부활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핵심입니다. 세계관이란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원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활신앙이 비뚤어지면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던 것입니다.

고대의 초대교회의 당시에 부활에 대 한 잘못된 주장은 크게 두 가지의 입장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첫째는 부활을 전면 부정하는 그룹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사두개인이었습니다(마 22:23). 둘째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부활을 인정하되 몸의 부활은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도 역시 몸의 부활은 부정하고 영혼의 부활을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7절에 보면 후메내오와 빌레도라는 사람이 “육체의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소위 예수님의 “영적인 부활”을 가르쳤습니다. 육체는 속되고 영은 거룩하니 부활은 영의 부활이지 육체의 부활은 무익하다는 논리였습니다. 요지는 육체의 부활은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들은 사두개인들과 같이 부활의 개념을 근본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cf. 마 22:23)만 그러나 “육체의 부활”은 부정했습니다(고전 15:12).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면서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병리적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생을 전부로 받아들이고 삽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허무주의입니다. 육체의 부활이 없는데 사람의 생애, 그것보다 더 허무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불교의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정이 그리워서 찾아온 딸을 끝내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부녀간의 인연을 두텁게 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이 될 뿐이라는 이유로 끝내 딸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게 될 부녀간의 인연이라는 것을 더 이어봤자 번민과 아픔만 더 할 뿐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지요. 만일에 육체의 부활이 없다면 그가 말한 대로 인간사도 헛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돈 버는 목적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추구할 달리 더 높은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고대의 에피쿠로스학파는 생의 특별한 목적이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한 쾌락을 누리는 것이 그나마 최고의 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쾌락주의의 밑바탕에는 어김없이 허무주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생을 전부로 보았고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소멸되어 없어진다고 보았기에 쾌락 외에는 달리 추구할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부활이 없으면 반드시 쾌락으로 떨어집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음란과 방종, 이기심과 게으름은 금할 길이 없습니다. 공산주의사회인 중국으로 눈을 돌려보세요. 대개의 남자들은 오후 4부터 술집에 가서 밤늦도록 여자들과 어울려 먹고 마십니다. 관료들은 일과시간 이후에는 설령 나라가 망한다 해도 상관 안 할 태세입니다. 비록 경제가 좋아져서 돈은 많다고 해도 타락을 금할 길은 없는 겁니다.

돈만으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입니다. 무신론과 유물론이 팽배한 사회에서 영적인 암흑 가운데 처한 사람들이 추구할 것 이라고는 술 취함과 육체의 쾌락과 사치가 전부일 뿐이며 이는 타락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면 복음의 가장 중요한 교리 전부를 다 부정하게 됩니다. 육체의 부활이 없다면 믿는 자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 몸으로 다시 사는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고”(v.14),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v.14), “사도 역시 거짓 증인이 되고”(v.15), “우리의 죄 씻음도 다 쓸데없는 짓이고”(v.17), “이미 죽은 자들은 땅 속에서 썩어져 소멸될 뿐”(v.18)이라는 사도의 말은 논리적으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부활에 우리의 생의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이 달렸습니다. 심판과 상급, 천국과 지옥 등은 모두 육체의 부활이 있어야 의미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데, 헌신이니 충성이니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고린도교회가 받은 은사가 많았고 남다른 열심을 갖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많은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까?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보다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1.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입니다.

 

①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었습니다. 그의 부활의 가장 큰 특징은 육체의 부활이었고, 제자들은 이미 보고 만져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500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친히 보았기 때문에 본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논증을 자세히 할 필요가 없었고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논의는 이런 이유로 간단한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 시에 더 나은 몸으로 나타나셨는데,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고 다 시는 죽지 않는 몸으로 거듭나신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사람의 특징은 육체성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사람으로 계신다는 것은 그의 육체의 부활을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②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예표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하면서도 죽은 성도들이 육체로 다시 산다는 것은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사람이었으므로 사람이 다시 몸으로 사는 법이 없다면 그도 다시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한다면 우리들의 몸의 부활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레위기 23:11에 보면 유월절 후 안식을 지난 첫 날 아침에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후 첫날 곧 주일에 부활했습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이제 곧 그를 뒤이어 성도들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살전 4:16).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의 부활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그의 부 활의 양식과 특징을 보면 우리의 부활이 어떠할지를 정확히 알게 하는 모델입니다.

③ 부활은 심고 거두는 법칙을 따릅니다. 바울은 부활을 씨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콩을 심은데 콩이 나고 팥을 심은데 팥이 나옵니다. 첫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이 몸은 이 땅의 삶에 국한된 몸이었고 반드시 한번 죽어야 합니다.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물려받은 우리의 몸은 죽을 때 씨처럼 땅에 묻히고 썩어집니다. 몸이 땅에 심겼으므로 다시 부활할 때는 반드시 몸의 부활로 거두는 것입니다. 몸을 심었으니 몸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는 다시는 썩지 아니할 몸, 죽지 아니할 몸, 신령한 몸,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부활합니다.

부활을 통해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물려받을 몸은 영적인 세계에 살기에 적합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몸은 죽을 때 약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 시에는 강한 것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은 죽음에 이르는 몸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부활의 몸, 다시는 죽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몸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요구되는 사건입니다. 즉 몸의 부활이 필요한 이유는 장차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몸을 입기 위함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v. 50).

하나님의 나라는 몸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영혼은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인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혈과 육”(v. 50)은 현재의 죽을 몸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인간성” 혹은 “인간의 몸”을 지칭할 때 즐겨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혈과 육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몸은 양립하지 못한다는 뜻을 피력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몸으로 가는 곳이되 현재의 죽고 썩을 몸으로는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 입니다. 말하자면 몸은 몸이되 현재의 이 몸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예컨대 물고기는 물에 살기에 적합한 몸을 지녔고 새는 창공을 날기에 적합한 몸을 가졌습니다.

현재 우리의 죽을 몸 그리고 썩을 이 몸은 이 땅에 살기에 적합한 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의 몸과는 다른 더 나은 몸 곧 신령하고 다시는 죽지 않고 썩지 않고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그런 몸이 요구됩니다.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재의 몸이 그 속성의 변화를 거쳐야 한다는 점과 그 변화의 중심은 부활이라고 말씀한 것에 있습니다.

실로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더 낫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는 사건입니다. 물론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더 나은 몸을 받기 전에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재림하는 날 그 때까지 살아있는 자들의 몸은 죽지 않고 더 나은 몸으로 일순간에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cf. 요 14:1-3; 고전 15:51-53; 살전 4:13-18). 그러나 그 외의 모든 성도들은 더 나은 몸을 받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저주도 심판도 아니라 몸의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의 경험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 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1. 부활은 우리의 몸의 열매를 드러낼 것입니다.

부활할 때는 우리가 행한 일도 함께 모두 드러납니다. 제가 목회했던 이민교회에 나오던 교인 중의 한 분이 자기의 집 인근에 있는 미국인교회의 수요일성경공부에 참석했습니다. 성경공부 유인물을 받아들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더랍니다.

“불신자들이야 말로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영원히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 세상만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영어를 듣는 일에는 서툴렀지만, 그러나 읽는 일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영어로 된 이 말을 그는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만일에 내가 영원히 살도록 지음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정말 그 목사님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 이 의문을 풀어보자는 마음에서 나온 곳이 바로 제가 목회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람은 더 나은 몸으로 영원히 살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뿐이라는 것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입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생애는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반드시 더 나은 몸으로 부활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몸으로 행한 모든 일도 부활의 아침에 하나님 앞에 모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나의 몸과 함께 나의 역사와 생각과 행위가 함께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되는 대로 살고 부패한 욕망이 이끄는 대로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잘한 일은 영원히 잘한 일이 되고 여기에서 잘못한 일은 영원히 잘못한 일로 남습니다.

이생에서 내가 행한 일은 없어지지 않고 부활과 함께 모두 드러납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쓰고 그렇게 살면 부끄러운 부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관한 강론을 마치면서 그 결론을 “주의 일 에 힘쓰라”는 헌신의 권면으로 끝맺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5:60).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주를 위한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을 지키다가 처자식이 유랑하며 걸식하는 신세가 되기도 하고 자신은 영어 (囹圄)의 몸이 되어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굶주리기도 하고 심지어 순교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를 위한 충성을 다하였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부활할 때 그 몸으로 행한 것이 함께 드러나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몸의 부활이 있다면 나의 일도 영원히 결코 잊히지 않고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 32-37절에 보면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가진 것을 팔아서 구제하고 유무상통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3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행 4:33).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헌신은 전적으로 부활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는 말

 

우리가 일을 할 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봐주면 힘이 나고 사람들이 박수치면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랑하려는 동기로 인해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과 교회를 위한 우리의 섬김이 사람의 기쁨을 위한 일이 되어서도 안 되고 명예를 위한 일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주를 위한 우리의 모든 수고와 헌신의 동기는 오직 부활신앙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며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몸의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1).

이 땅에 사는 동안 나에게 주어진 길을 불평도 원망도 없이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