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자기성찰은 발전의 지렛대이다
곧 12월, 성찰의 계절이다. 자기성찰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잘 들여다봄이다. 거울이 필요 없는 인생이나 사회는 없다. 개인, 단체, 국가를 막론하고 자신을 바로 보기를 외면한다면 왜곡과 퇴보의 길을 막을 수 없다. 행정부나 기업, 유수의 방송사들처럼 우리 개인과 교단도 일종의 옴부즈맨 장치 혹은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발전적 자기성찰은 유익하다.
개선하는 로마 황제의 옆에는 “당신은 인간이오.”라는 말을 반복해 주는 철학자가 있었다. 황제가 신처럼 숭배되던 시대에 그는 결코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일종의 각성 장치였다. 자아도취에 매몰되지 않고 성찰하며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자세는 개인은 물론 사회적 발전의 매개이다.
바울이 말한 매일 죽는 신앙도 십자가 앞에서 자기성찰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느 수도자가 세상을 변화시키게 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나이 들어 이웃만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게 해 달라 했고 급기야 노년에는 내 자신이나마 변화시켜 달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지 않은가.
퇴계의 제자 학봉 김성일도 道吾過者是吾師, 談吾美者是吾賊 (도오과자시오사, 담오미자시오적), 즉 ‘나의 잘못을 말하는 자가 나의 스승이고 나를 좋게 말하는 자는 나의 적’이라 했다. 이는 무조건적 비판예찬론이 아니라 자기과대평가를 경계하고 자기성찰을 통한 건전한 자기객관화의 가치를 강조한 말이다.
엄혹한 철의 장막, 죽의 장막 속에서도 비판적 지성들이 있었다. 소련의 파스테르나크나 솔제니친, 중국의 류사오보 등의 반체제 인사들과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지성들은 자기 나라에 성찰을 촉구하는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워드 진, 노암 촘스키 등 미국의 지식인들의 충언은 그들 주장의 시비를 떠나 일정 부분 미국 사회의 오류를 성찰케 하고 미국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자기성찰은 개인과 공동체의 역사를 정직하게 되짚고 감사의 제목을 찾게 하며 긍정적 반성으로 이끈다. 물론 그것이 자기학대로 변질돼선 안 된다. 자기성찰은 때론 긴장과 아픔을 동반한다. 그러나 절망의 촉매제가 돼선 안 된다. 자기성찰은 때론 소소한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파괴적이 아닌 생산적 갈등이어야 한다.
자기성찰은 상습적이거나 터무니없고 의미 없는 신랄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연민, 자기실망 그리고 불화와 좌절의 단초도 아니다. 가장 건전한 자기 객관화를 토대로 하는 미래적이고 발전적인 진지한 반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최소한의 정당하고 적실한 자기성찰은 자신과 공동체를 발전 성숙시키는 지렛대이다.
정암 박윤선 목사의 경건도 철저한 자기성찰을 기반으로 한다. 정암은 목사의 7대 선서를 가르치며 “주 안에서 같은 직원 된 형제들과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기를 맹세합니다”.라는 제4선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목사는 행 5:29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사람과 하나님을 비교하여 보는 때에 나온 말씀이다. 사람과 하나님을 비교하는 일이 없는 다른 경우에 있어서 목사는 언제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하며(빌 2:3), 특히 동역자들의 의견을 존중시해야 한다. 하나님 밖에는 누구든지 홀로 바로 행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따라서 자기성찰의 과정으로서 성경 말씀에 근거한 부단한 성찰과 순종은 물론이요 이웃의 의견을 청취하고 반영하는 일 또한 의미가 깊다. 자기성찰에 도움을 얻으려면 가족이나 공동체 구성원들의 여론을 골고루 들어보고 객관적인 외부인의 말도 참고해야 한다. 이는 남의 눈치를 보라거나 부화뇌동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기를 정직하게 성찰하는 데 충분히 유익한 조언들을 새겨 반영할 때 참다운 발전이 있다는 뜻이다.
유독 고통스럽고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돌아볼 시간들이 다가온다. 개인과 한국교회, 나아가 한국사회가 면밀하고도 객관적이며 긍정적인 자기성찰의 과정을 갖기 바란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우리 교단도 새해와 합신 40주년을 맞이한다면 그 발전적인 의미가 증폭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