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설교/아가 8:13-14] 마라나타, 그 사랑의 완성_정철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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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설교

아가 8:13-14

마라나타, 그 사랑의 완성

정철웅 목사(알타이선교회 순회선교사)

주님이 동행하시고 내 안에 거하시는 삶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정철웅 목사(알타이 선교회 순회선교사)

 

나를 기대하시는 주님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의 마지막 화답이며 마지막 대화가 시작됩니다. 아가서는 신랑의 한 마디 소원과 신부의 한 마디 소원으로 끝을 맺습니다.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아 8:13A (신랑)

이는 신부를 향해 부르는 새로운 애칭인 동시에 마지막 애칭입니다. 아가서에 등장한 신부의 애칭은 다양했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나의 어여쁜 자’, ‘나의 완전한 자’, ‘귀한 자의 딸’, 그리고 ‘사랑아’ 등입니다. 이제 그 뒤를 이어 ‘너 동산에 거하는 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동산에서 시작되어 동산으로 끝이 납니다. 동산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구조입니다. 구약에서 동산이 가장 많이 반복되는 성경은 창세기와 아가서입니다. 동산은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에덴동산을 언급할 때 12회 사용되었고, 아가서에서는 6회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2-3장에서 동산은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가 살던 곳이었습니다. 범죄하기 이전에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 동산에서 최초의 범죄가 범해진 후에 원시복음이라 부르는 최초의 복음이 선언되었습니다(창 3:15).

그런 의미에서 ‘동산에 거주하는 자’라고 부르신 것은 에덴동산에서 거주하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향한 주님의 기대를 함축한 호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와 아가서를 연결해서 묵상하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라는 창조 때의 하나님의 명령을 아담과 하와가 순종함으로 이루어가기를 기대하셨던 주님이 이제 그 기대를 신부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아가서에서 ‘동산’은 신부의 마음이었습니다. 신부의 마음이 주님이 매일 거니시는 동산이 되므로 신부가 맺는 열매와 향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기대가 내포된 사랑의 칭호입니다. 또한 12절에 나오는 신부의 새로운 다짐을 인정하시는 주님의 격려이기도 합니다.

나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주님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아 8:13B (신랑)

친구들은 1장 7절에서 쓰인 후 이곳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이들은 왕이 궁을 벗어나 목자가 되어 양을 치고 있을 때, 그 옆에 함께하는 목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한 이들, 곧 천사들이며 또한 목자장 되신 주님의 동역자, 주님이 사랑하셨던 목자들,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을 의미합니다.

8장에서 친구들은 1장에서의 의미와 동일합니다. ‘나의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곧 내가 듣고 싶은 것이 너의 목소리’ 87라는 뜻입니다. 이는 신부가 주님을 가까이 하기를 열망하는 이상으로 신랑이 신부를 가까이 하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2장 14절에서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라는 말씀으로 신부의 음성 듣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신부의 음성은 곧 기도가 됩니다. 기도는 향기가 되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2장에서 거친 세상에서 살며 신앙이 흔들릴 때, 하늘 처소를 기억하고 기도로 소명을 이루어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8장에서는 성숙한 신부로서 그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친구들에게 삶의 본이 되어 살아가기를 당부하십니다.

‘네 소리를 내가 듣게 하라’라는 말씀은 기도를 의미하면서 더 나아가 주님과의 동행,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기도로써 다시 오실 주님을 뵐 때까지 신부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것입니다.
주님이 동행하시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삶은 곧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죄로 가득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우리 삶이 열매로 보이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부는 주께서 속히 오시길 기다린다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아 8:14 (신부)

아가서의 마지막 음성은 신부의 소원입니다. 신부의 소원은 노루처럼, 어린 사슴처럼 빨리 달려와 달라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신부의 세 마디 열망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입 맞추어 주세요’, ‘더욱 가까이 가고 싶어요’,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신부는 여러 장애물을 뛰어넘어 점점 주님을 닮아가면서 주님의 향기와 열매를 그 삶에서 맺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마지막 열망으로 ‘빨리(이리) 오세요’(Come Away)라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신부가 신랑이 속히 돌아오기를 소원하는 고백입니다. 2장 17절은 8장 14절의 마지막 말씀의 배경을 잘 드러내줍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아 2:17(신부)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하루의 저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의 때를 가리키는 숙어로서 종말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렘 6:4)에서도 저녁 그늘은 단지 하루가 저문다는 뜻이 아니라 심판과 연결된 종말을 의미합니다. 2장 17절에서 종말론적 사건을 배경으로 ‘돌아오라’가 쓰였듯이, 8장 14절의 ‘빨리 달리라’ 역시 ‘빨리 돌아오세요’라는 종말론적 오심에 대한 강한 열망의 표현입니다.

성경은 오실 주님에 대한 약속과 대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창세기 3장 15절부터 궁극적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결론부에서는 ‘하나님이 내세에 하실 심판을 기억하라’(전 12:13)라고 말합니다. 욥기는 고난 중에 내세를 바라보며 고백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 26

이사야는 오실 메시아를 왕으로 오실 메시아(1-39장)와 종으로 오실 메시아(40-66장)로 구분해서 오실 주님을 예언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사 9:6,7

 바울이 세 안식일에 말씀을 전하여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는 당시 주변 도시에 복음의 도전을 주었는데, 그들의 믿음의 특징은 주님의 강림(살전 1:10; 2:19; 3:13; 4:16; 5:23)에 대한 자세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님의 강림을 소망하며 살기를 기대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살전 2:19, 20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도 바울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열망은 ‘속히 오실 주님’을 대망하는 것이었고,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라는 고백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마라나타’라고 말하면서 오실 주님을 소망하고 자신들이 당한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아가서의 결론은 요한계시록과 같은 결론으로 끝나며, 오실 주님에 대한 사랑의 열망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백은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의 ‘마라나타’이며, 성경을 끝맺는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 이 땅에 사는 신부인 성도들의 기도를 듣기 원하시는 것이었다면(13절), 이제 성숙한 사랑을 하게 된 신부의 마지막 소원은 신랑 되신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14절). 주님은 우리가 서로 다시 만나는 시간이 올 때까지 우리의 목소리를 듣기 원하십니다. 얼마나 나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하시고 기다리실까요? 나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얼마나 사모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까요?

장애물을 넘어 성숙의 열매로

사고로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부모는 자녀를 천국에 먼저 보내고 난 후 대개 자녀들이 쓰던 휴대전화기를 그대로 간직한다고 합니다. 자녀가 몹시도 보고 싶을 때, 자녀가 남긴 전화기에 전화를 걸면 녹음되어 있는 사랑하는 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돌아오면 곧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하루하루 눈물로 그리움을 삼키며 살아갑니다. 자녀를 잃은 고통 가운데, 자기 생명보다 귀한 사랑하는 딸의 이름을 자기 심장에 새겨 넣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런 부모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그리워하며 사는 성도들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과의 기도의 줄이 깊어지기 바랍니다. 기도의 강가에 서기 바랍니다. 기도의 폭포 한가운데 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장에 주님의 깊은 사랑이 깊이 새겨지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열망에서 시작된 사랑은 여러 장애물을 넘은 후 성숙한 사랑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랑의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강한 열망이 기다림으로 표현됩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너는 내 사랑, 정철웅 지음, 아르카, 2017>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