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신학논단| 개혁교회의 율법과 언약 이해 _ 이남규 교수

0
109

긴급 신학논단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

– 개혁교회의 율법과 언약 이해

 

<이남규 교수 | 합신, 조직신학 | 시은교회 협동목사>

 

첫 행위 언약으로, 완전하며 개인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아담 안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

그리스도의 수동적, 능동적 순종은 별개로
분리할 수 없으며 단일 순종으로 말해야 한다

 

개혁교회의 율법과 언약 이해는 이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잘 표현되어 있다. 본래 우리는 피조물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며, 하나님께 먼저 축복과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1). 개혁신학자들은 이것을 자연적 복속이라 불렀다. 그런데 하나님은 친히 낮아지셔서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에 대한 순종에 축복과 보상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인류와 맺은 첫 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2). 개혁신학자들은 이것을 언약적 복속이라 불렀다. 아담의 타락 이후 아담에 있는 인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6장, 19장). 개혁신학자들은 이것을 형벌적 복속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하나님이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인류를 위해 두 번째 언약을 맺어주셨으니, 이것을 은혜언약이라고 부른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3). 이런 율법과 언약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아담에게 주어진 율법의 의미를 살펴보고,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오셔서 행하신 순종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 개혁교회의 여러 신조들과 개혁신학자들을 통해서 이 교리의 풍성함을 확인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지면상 칼빈의 생각만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아담과 율법>

우리가 먼저 알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자가 단순히 타락 전 아담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광의 상태에 오른다는 것이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7-49)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지라도 아직 하늘에 속한 상태는 아니었다. 창조된 아담의 생명을 하늘에 속한 생명으로 묘사하면 이 말씀과 어긋난다. 아담은 이 땅에서 자란 식물의 열매가 필요했으며, 그 몸은 영화롭게 된 몸이 아니었다. 따라서 아담의 상태는 ‘온전한 상태’(status integritatis)였으나 ‘영광의 상태’(status gloriae)는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고 순종의 행위에 생명을 약속하신다(겔 20:11; 느 9:29; 눅 10:28; 롬 10:5; 갈 3:12).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롬 10:5)는 말씀처럼, 율법은 의의 완전한 규범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9.2). 그러므로 우리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행위 언약으로 한 율법을 주셨다.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을 개인적이며, 완전하며, 정밀하며, 영속적인 순종을 할 의무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성취하는 조건으로 생명을 약속하셨으며, 그것을 깨뜨리는 경우에는 죽음을 경고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과 힘을 부여하셨다”(19장 1항). 또 “사람과 맺으신 첫 번째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다. 이 언약으로, 완전하며 개인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그리고 아담 안에 있는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7장 2항). 그런데 이 생명이 단순히 아담의 상태에 변화가 없는 지속의 의미라면, 아담은 하늘에 속하지 못한자로서 영원히 이 땅에서 살아야 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늘에 속한 영생의 개념과 다르다(고전 15:47-49).

칼빈은 주석에서 아담의 상태에 대하여 완전에 도달해야 하는 상태, 즉 아직 완전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로 말한다. “…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완전에 도달할 때까지 그 안에서 오직 그림자로 나타났다.”1) “인간의 상태는 아담의 인격 안에서 완전하지 않았다. … 아담의 타락 전에 인간의 생명은 땅에 속했는데, 왜냐하면 견고하며 고정된 지속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2) “아담은 하나님의 정하심에 의해 땅의 거주자였으니 그가 그의 지상 삶을 지나면서 하늘의 영광을 묵상하기 위함이다.”3) 칼빈에 의하면 아담은 완전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요, 땅에 속한 상태요, 견고하며 고정된 지속성을 가지지 못한 상태다. 아담은 하늘의 영광을 아직 소유하지 않았으며 하늘의 영광을 묵상하는 자다. 아담에 대한 이런 묘사는 아담이 더 나은 삶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모습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1559년 칼빈은 창세기 2:15-17을 본문을 설교하면서 아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가 단번에 하늘 유업을 누리지 못했을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가지 상태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처음 만들어진 상태와 그리고 이 땅에서 자신의 여정을 마친 후 준비된 상태 말입니다.”4) 여기서 칼빈은 타락전 선악과 금지 명령을 받은 아담의 상태에 관해 ‘하늘 유업을 누리지 못한 상태’라고 부른다. 아담은 자신의 길을 마친 후에야 자신에게 주어진 상급을 누리는 것이다. 같은 설교에서 칼빈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즉 그는 이 땅에서 그의 창조주 안에서 기뻐했으며 입을 크게 벌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이유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비참과 비애에서 제외되었을 것인바,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에게 할당된 유업을 누리기 전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선함을 맛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이런 상태에서 아담은 하나님이 그를 향해 가졌던 부성애(…)를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볼수 있었고, 말하자면 유쾌한 길로 가면서, 그에게 계시된 영생에 이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5)

여기서 처음 창조된 아담의 상태는 하나님나라를 열망해야 하는 상태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선하심을 맛보며 영생에 이르러야 했다. 칼빈에게 아담의 첫 상태는 하늘 유업을 누리지 못한 상태며, 영생에 이르지 못한 상태다.

칼빈에 의하면, 아담은 처음 창조된 무흠의 상태에서 자신의 자유의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무흠(integritas)의 상태에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야 했다. “이러한 순전한 상태에서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자유의지로써 영생에 도달할 능력이 있었다.”6) “땅의 생명이 그에게 일시적이었을 것이고, 죽음없이 무사히 하늘로 옮겨갔을 것이다.”7) “그가 무흠에 있었더라면, 첫 사람은 더 나은 생명으로 넘어갔을 것이다.”8) 아담은 “최초의 상태”에서 영원한 복락”으로, “순전한 상태”에서 “영생”으로, “땅의 생명”에서 “하늘”로, “더 나은 삶으로” 옮겨가야 했다는 것이 칼빈의 의견이다.

칼빈은 아담의 타락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지는 둘 중 어느 곳으로나 갈 수 있었고 지속적인 불변성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도 쉽게 타락했던 것이다.”9) 하나님이 범죄할 수 없는 인간을 지으셨어야 완전한 인간을 지으신 것이 되며 하나님께 책임이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칼빈은, 범죄할 수 없거나 범죄하기를 원하지 않을 인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한다.10) 하나님은 아담을 선하게 만드시고 그에게 풍성하게 주셨으니 범죄의 책임은 아담에게 있다.11)

이런 칼빈의 생각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9장 2항과 일치한다.

인간은 무죄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앞에 선한, 또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는 것을 원하고 행할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가변적이어서 그 상태에서 타락할 수 있었다.1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무죄한 상태의 인간을 선하다고 말하며, 동시에 가변적이었다고 말한다. 아담은 선했으나 그 선에 고정된 상태는 아니었고, “가변적” 이었다. 이런 인간의 의지는 영광의 상태에서만 “완전히 불가변적으로 자유롭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9장 5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아담의 첫 상태인 무죄의 상태와 우리가 이르게 될 영광의 상태를 구분한다. 이 둘의 구분을 없앤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단지 아담의 첫 상태, 즉 우리가 이르게 될 영광의 상태에서가 범죄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갈 곳은 단순히 무죄의 상태가 아니라 영광의 상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은혜로 회복되되 단지 최초의 상태, 즉 우리 조상 아담의 순전함으로가 아니라 훨씬 더 좋고 탁월한 상태-우리가 천사와 하늘나라의 상속자들의 동료가 되는 것-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읍시다.”13)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

성경은 성육신을 율법 아래에 오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신 것으로 설명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따라서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 율법에 대하여 어떤 성취를 하셨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첫째, 율법은 죄인인 우리에게 형벌 받을 것을 요구한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그 마음의 계획이 항상 악하며(창 6:5, 8:21),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기(렘 17:9) 때문에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시 143:2).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로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롬 3:19)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갈 3:10)한 경고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율법 아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해당하는 모든 형벌을 우리 대신 지불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8).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이처럼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하셨으니 율법을 범한 죄악에 대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으신 일을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라 일컫는다.

둘째, 율법은 또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고 이 완전한 순종을 우리의 의라 칭하며 생명을 약속한다.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신 6:2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느 9:29) 주 예수께서도 직접 말씀하시되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롬 10:5) 그러나 부패한 우리로서는 이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부패한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우리로서는 율법을 지켜 생명에 이를 가능성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완수하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으며(마 5:17)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롬 10:4).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신 6:25)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는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고전 1:30).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이 명한 모든 것을 지켜 얻는 의로움을 우리에게 주시니 이것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은 별개의 두 가지 순종으로 분리할 수 없으며, 하나의 단일 순종으로 말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애의 한 순간을 떼어 분리할 수 없다. 또,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만족시키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의 생애 말년에 있었던 형벌로서의 그리스도의 고난에만 제한하는 것은 성경과 어긋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단순히 마지막에 흘렸던 그 피만이 아니다. 나아가 마지막에 있었던 고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그 앞서 있었던 생애 전체의 고난과 순종을 포함한 총합이다. 한순간도 제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순종은 단 하나의 의로운 행위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율법을 지켜서 얻는 의까지 얻으신 것이라던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으로 율법을 지켜서 얻는 의까지 얻으셨다는 말은, 아직 이 교리 설명의 요점을 놓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부터 능동적 순종을 분리할 수 없으며, 율법을 지켜서 얻은 의의 전가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교리 체계 내에서 설명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칼빈이 이 내용을 정죄했거나 배타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칼빈은 율법의 순종 요구의 항구성을 지속적으로 가르쳤으며, 율법 준수의 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성취,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그 의가 전가됨을 인정했다.

칼빈은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의 말씀대로 율법 준수의 의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어 우리에게 전가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누구든지 율법을 성취할 자에게 주어질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구해야만 한다. 또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라고 율법 안에서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약속하신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얻는다.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에서도 똑같이 분명하게 확인되는데, 모세의 율법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다(행 13:39).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움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짐을 지심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 화목시키셨으니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 자들인 것처럼 우리에게 은혜로운 공로를 얻어주셨다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Inst. 2.17.5)

또 칼빈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순종에 십자가의 순종만이 아니라 전체 생애의 순종, 그리고 나아가 성부의 명령에 순종하여 의를 이루는 부분까지 포함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불화를 걷어내시고 우리에게 의를 얻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다시 은혜와 친절을 입게 되었는지 질문이 있다면, 이렇게 일반적으로 대답할 수 있으니, 즉 그가 전체 생애를 지나는 순종을 통하여(toto obedientiae suae cursu) 우리를 위해 성취하셨다. …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세례시에도 자신이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으로 완수하셔서 의의 한 부분을 이루셨다고 말씀하셨다(마 3:15). 결론적으로 그가 종의 형체를 입은 때부터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자유의 값을 치르기 시작하셨다.(Inst. 2.16.5)

나아가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는 것과 별개로 율법을 성취해서 얻는 의를 우리를 위해 성취하시고 우리에게 전가하셨음을 인정했다.

바울은 두 가지를 가르친다. 바울은 말한다[갈 3:12관련]. 우리가 모든 점에서 율법을 성취함으로써 또 하나님 앞에서 감당함으로써 의로움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에 복속되어야 했으니 그의 순종을 우리에게 전가하시기 위한 의도였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 자신의 순종처럼 그것을 받으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됨에 대해 말할 때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율법에서 명령한 것을 순종해야 한다. 그가 의로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 것이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왜? 어떤 속박도 복속도 없으신 주권자 왕이신 그가 기꺼이 자신을 율법에 복종했고 그 짐을 우리를 위해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간주된다. 왜 그러한가? 그가 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리고 그의 그 순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니, 율법 위에 계셔서 그에게 어떤 복속도 어떤 속박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해 순종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도움을 구하러 그에게 피할 때에 우리 하늘 아버지는 마치 우리에게 완전한 순종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받으신다.

이제 바울은 우리가 율법에 의해 정죄되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저주를 감당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 [이하 갈3:13 관련 진술]14)

지금까지 율법과 언약의 이해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나 자신이 성취한 것처럼 여겨 주십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60문). “자신의 모든 공로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성취하신 많은 거룩한 사역들을 우리에게 전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다”(벨직신앙고백서 22항). 우리 옛 교회의 위로 가득한 고백을 아무도 뺏을 수 없다.

 

<주>

1) CO 23, 27. [창 1:26]
2) CO 23, 36. [창 2:7]
3) CO 23, 37. [창 2:8]
4) 장 칼뱅, 박건택 역 『칼뱅 구약설교집 1/1 창세기설교1』, 158.
5) 장 칼뱅, 『칼뱅 구약설교집 1/1 창세기설교1』, 158.
6) “In hac integritate libero arbitrio pollebat homo, quo, si vellet, adipisci posset aeternam vitam.” Instituio, 1.15.8. CO 2, 143.
7) “Terrena quidem vita illi fuisset temporalis: in coelum tamen sine interitu, et illaesus migrasset.”[창 2:17] CO 23, 45.
8) “Transiturus quidem fuit primus homo in meliorem vitam, si interger stetisset:”[창 3:19] CO 23, 77.
9) “… quia in utramque partem flexibilis erat eius voluntas, nec data erat ad perseverandum contantia, ideo tam facile prolapsus est.” Inst. 1.15.8.
10) Inst. 1.15.8.
11) Inst. 1.15.8.
12) “Man, in his state of innocency, had freedom and power to will and to do that which is good and well-pleasing to God, but yet mutably, so that he might fall from it.”
13) 장 칼뱅, 『칼뱅 구약설교집 1/1 창세기설교1』, 296.
14) John Calvin, The Sermons of M. Iohn Calvin upon the Fifth Booke of Moses Called Deuteronomie, trans. Arthvr Golding (London: Henry Middleton, 1583), 763; CO, 27: 6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