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방이 없습니다”-합신을 은퇴하면서 _ 조병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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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방이 없습니다”

– 합신을 은퇴하면서

 

<조병수 교수 | 합신, 신약학>

 

학교는 다음 세대의 교회를 책임질 인물을 길러 주고
교단은 학교를 신뢰하고 적극 후원해 주기를

 

여름 방학이 한창일 때, 개강하면 학교 연구실로 찾아뵙겠다는 누군가의 말에, 다음 학기부터는 학교에 내 방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곧바로 “왜요?”라는 반문이 돌아왔고, “은퇴를 하니까요”라고 귀띔해 주었다. 거의 모든 요직을 거치면서 이것저것 다 합해 대략 26년의 세월을 학교에서 보내고, 나는 은퇴를 했다.

알량한 지식이라도 전수할 터전이 있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신학의 거대한 해일에 밀려 나 자신도 정신을 못 차리면서 겨우 한 그릇 물을 받아 목마른 교실을 달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중도에 하차하지 않고 한 학교에서 퇴임하는 것도 감사하다. 오래 전 교직에 전념하려고 목회를 내려놓던 시점에 어느 학교가 제안한 부총장직을 사양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 같다. 신학이며 일상이며 마음 열어놓고 왁자지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료 교수들이 있었으니, 그것도 감사하다. 이따금 다른 학교의 교수들과 회동하면 이런 소란스런 대화 때문에 우리는 으레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감사한 일 가운데 학도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수업하러 교실에 들어서면 일제히 와르르 일어나 반겨준 학도들이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리고 그들이 전국과 세계에 퍼져 내가 했던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니 얼마나 감사한가.

섭섭한 일은 없었을까? 누군가에 비해 대우를 덜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섭섭한 마음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청동 지붕 아래 냉방기 하나 없는 공간을 연구실로 배정받아 뜨거운 여름을 맨살로 견뎌야 했을 때 그 섭섭함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승진이 지연되었을 때 서운한 감정은 더욱 가중되었다. 비싼 유럽의 책들을 손이 떨려 구입할 수 없어서 논문의 질이 턱없이 낮아졌을 때 속 쓰림이란 어떤 위장 장애보다도 컸다. 좋은 글을 많이 써달라는 요청은 끊이지 않았지만 저술에 도움을 주겠다는 호의는 소수 외에 거의 없었다. 바른 신학을 보존하고 교육하고 전수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 작업인지 사람들은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듯했다.

은퇴하며 뒤돌아보니, 아쉬운 일들도 적지 않다. 오랜 시간 주로 신약성경을 연구하였는데, 아쉽게도 구석진 구절들을 다 살펴보지 못했고 광활한 주제들을 다 펼쳐보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갑자기 연구 범위를 벗어나는 질문을 받으면 답변이 궁해져 버벅거리고 만다. 학교는 과목의 분배와 균형을 중시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제도의 틀에 몸을 담고 있는 까닭에, 다른 과목 교수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영역을 침범하는 월권을 행사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 가운데 하나이다. 후학을 교육할뿐더러 그들의 삶과 경건을 관리하며, 행정에서는 보직을 맡고 과다한 회의에 참석하다 보니, 늘 시간이 딸리고 힘이 부쳐 학문을 세계로 확장시키지 못한 것도 아쉬움 가운데 아쉬움이다. 아마도 가장 아쉬운 것은 어그러진 시대정신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어벤저스”를 많이 길러내지 못한 것일 게다. 사실, 나 자신도 상아탑에만 갇혀 있었을 뿐이지 행동하는 어벤저스의 한 명이 못 되었으니 별로 할 말이 없다.

이렇게 감사함과 서운함과 아쉬움으로 버무린 교직을 뒤로 하고 나는 은퇴를 했다. 재직 기간은 나 자신과 싸운 세월이었다. 귓가를 간지럽히고 귓속을 달콤하게 만드는 말들은 듣기에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찬양 일색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우쭐거림을 떨쳐내야 했고, 비수로 찌르듯이 인정을 요구하는 비판 앞에서는 가슴을 열어야 했다. 학식을 뽐내려고 교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기르려고 교직을 맡았음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학생들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상관없이 혼자서 제 잘난 말을 하다가도 퍼뜩 정신이 들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총장 말기에 여러 사람이 재선임 말을 비쳤을 때, 나는 원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뜻이니 따라야지 않겠냐며 마음속 깊이 꿈틀거리는 비열한 유혹과 싸웠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타인에 의해 “나”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나”를 만들 것인가, 두 요구 사이에서 재직하는 내내 끊임없이 격전을 치른 셈이다.

은퇴를 하니 이제는 이런 싸움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나를 감싼다. 당분간 현재 집필 중인 저술을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완성하는 데 힘쓰고 싶고, 전공서적에 밀려 먼지 덮인 채 서재에 박혀 있던 이런 저런 책들을 맘껏 읽어볼 요량이다. 강의와 수업에 구애받음 없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활동하고픈 생각도 든다. 기왕에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를 세웠으니 이 일도 박차를 가해보리라.

은퇴하면서 학교에 바라는 마음은 다음 세대의 교회를 책임질 비범한 인물을 길러 주십사 하는 것이다. 못하는 자를 잘하게 만들고, 잘하는 자를 더 잘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이라고, 평소 나는 믿어왔다. 조금 못난 사람이건 조금 잘난 사람이건, 학교는 학생으로 받은 후에는 기념비적인 목회자로 양육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아울러 교단에 바라는 마음은 학교를 신뢰하고 적극 후원하십사 하는 것이다. 학교는 비난의 대상도 공격의 대상도 아니다. 성년의 나이를 넘긴 사람의 인격을 학교가 그토록 짧은 수업일수 동안 격변시키고 경건을 증진시키리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꿈이다. 은퇴하는 나 자신에게도 아직 먼 얘기이지만, 학창시절 못 이룬 인격과 경건이 이후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무르익기를 바라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