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마우의 <왜곡된 진리>
< 민현필 목사, 중동교회 교육담당 >
“타락한 인간의 보편적 문제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을 사단이 왜곡한 것”
이 책은 번역 과정부터 강영안 교수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해 번역된 기독교 세계관 관련 도서다. 하지만 주의 깊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새 목회 상담학 관련 책을 읽은 듯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 책의 메시지를 목회적 차원에서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렇다.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 형식보다는 왜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지에 더 먼저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목회현장에서 성도들과 더불어 각종 사역을 진행하다 보면, 서로의 생각이 부딪히고 살아온 시간과 연륜의 차이에서 오는 어떤 긴장과 단절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간극을 불필요하게 잘못 해석하다 보면 자칫 갈등의 골이 깊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 마우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그들이 의식적으로 표현하는 세계관이나 가치체계의 이면에 어떤 특정한 ‘희망과 두려움’이라는 동기가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마음의 동기를 꿰뚫어보지 못한다면 외적인 행동양식이나 가치체계에 대한 판단은 그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마우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어떤 믿음 체계를 철학적, 신학적 토대 위에서 엄격하게 평가하는 일과 그러한 믿음을 어떤 사람의 영적 순례라는 더 넓은 배경에 관련시켜 이해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마우에 의하면 삶 속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영역들은 대게 신뢰라는 것으로 지탱될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신뢰하는 존재이며, 이 신뢰야말로 인간성의 핵심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세속적 휴머니즘을 지향하든, 범신론적 일원론에 몰입하든, 주술주의에 빠져 있든지, 허무주의를 신봉하든지, 상대주의의 늪에 빠져 있든지 간에 각각의 세계관에 대한 논리적 분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더 신뢰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우는 주술주의를 하나의 ‘독특한 신뢰방식’이라고 요약한다.
세계관을 분석하면서 왜 마우는 신뢰의 문제를 지목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범죄하여 타락한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기 3장 문맥에서 죄의 본질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근본적인 신뢰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에 두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죄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그분이 만든 것을 사랑하고 숭배한다’고 했던 것이다.
우리 시대에 난무하는 온갖 이즘들(ism)들이란 실상 하나님을 상실한 자아의 불안을 구체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에 불과하다. 이 지점에서 마우는 우리가 이 불안을 조장하는 현실적인 ‘두려움과 희망’을 바로 해석하지 못한다면 사탄의 간교함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마우가 볼 때, 거짓의 아비 사단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유혹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희망과 두려움’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진리를 왜곡시키는 존재일 뿐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즘들에 대한 세계관적 분석을 시도하면서 마우는 우리에게 ‘신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더 나아가 그 신뢰가 머무는 자리인 마음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마우에게 있어서 외적인 표현 형식으로서의 세계관들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그저 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 인간은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능력은 가장 깊은 신뢰를 형성하는 장소에 있다. 바로 성경이 ‘마음’(heart)이라고 부르는 내밀한 곳이다. 이 곳은 피조된 인간의 실제적 중심이다. 신뢰 할동을 하는 이 공간은 우리의 인식이나 정서나 의지보다 더 궁극적이며,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는 방향을 부여해 주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일차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공감적 인식은 공공 신학자로서의 마우를 특징짓는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마우에게 있어서 타락한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된 인간의 창조적 활동을 사단이 교묘하게 왜곡시킨다는데 있다. 왜곡된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버려야만 하는가? 마우는 그 창조적 활동들 속에서 ‘연결과 접속’을 추구하는 인간의 갈망을 본다.
예를 들어, 뉴에이지 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들 안에 있는 ‘두려움과 희망’ 곧 ‘우주적 통일을 바라는 일원론적 갈망’을 간파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것은 연계성(connectedness)에 대한 갈망이요, 통합된 삶에 대한 향수에 다름 아니다.
마우는 현대인들의 고향 상실과 그로 인한 주술주의에의 집착 역시도 ‘더 광범위한 이야기’에 접속(연결, connecting)되기를 바라는 갈망임을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주술주의는 소속감과 정체성(‘뿌리’)를 찾고 싶은 사람이 발견해 낸 일종의 ‘연락 체계’(networking system)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리처드 마우는 명민하게도 다음과 같이 어거스틴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가 바라기에 참된 것과 실제로 참된 것이 꼭 맞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유명한 기도의 내용이다. ‘주께서 우리를 당신으로 향하도록 지으셨기 때문에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까지는 우리의 마음은 쉬지 못합니다’”
이렇게 볼 때, 마우가 인식했던 ‘마음의 중요성’은 다른 아닌 파스칼이 “내 마음(coeur)에는 이성(raison)이 모르는 이유(rasion)가 있다”고 했을 때의 그 마음과 다르지 않고, 어거스틴이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마우의 세계관적 분석은 공공 신학적이며, 어거스틴적인 사유와도 닮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마우가 “인간은 시간과 변화로 인해 제한되어 있어 불안정한 존재이지만 영원한 진리가 되신 하나님께(ad Deum) 마음이 열려있는 존재”라고 했던 어거스틴의 사상을 어느 정도 현대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판단한다. 물론 그의 사상 전체가 과연 ‘충분히 어거스틴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혹자는 마우가 진리의 반정립적(antithesis)적인 측면을 간과했다고 느낄 수도 있으며, 죄와 사단의 영향력을 너무 가볍게 취급했다는 볼 맨 소리를 내놓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마우의 주장에 다 동의할 필요는 없다. 리처드 마우를 어떻게 읽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우리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독서하는 즐거움 아니던가?
그러나 이 책에 담긴 인간에 대한 마우의 따뜻한 시선만큼은 우리 목회자들이 꼭 눈 여겨 보았으면 좋겠다. 결국 목회자는 성도들의 마음과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