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칼빈의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을 읽고 _ 이원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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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칼빈의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을 읽고

 

<이원평 목사 | 춘천돋움교회>

 

칼빈은 분리를 추구한 인물이 아니라
교회 연합을 전심으로 추구한 인물이었다

 

파리대학 총장으로 선출된 니콜라스 콥의 취임연설문을 대신 써 준 일이 당국에 들통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칼빈은 파리 탈출을 강행한다.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한 칼빈은 한동안 남프랑스로 피신하였다가 바젤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스트라스부르로 가려했다. 하지만 국경 지대의 전쟁 때문에 남쪽으로 우회하던 중 제네바에 잠시 머물게 된다.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해 있다는 소식을 지인으로부터 전해들은 파렐은 그가 머물던 숙소로 다짜고짜 찾아간다.

그곳에서 개혁에 동참하라는 파렐의 불같은 호령이 젊은 칼빈 앞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 다혈질의 제네바 개혁자 파렐 앞에서 한동안 저항하며 버티던 칼빈은 마침내 파렐의 음성 속에 담긴 하나님의 두려운 손길을 감지하게 된다. 칼빈은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이로써 제네바에서 역사적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록 짧지만 헌신적인 목회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칼빈은 제네바 시당국과의 마찰과 개혁의 흐름에 저항하던 반대파들에 의해 그만 제네바에서 추방을 당하고 만다.

한편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당하여 떠난 사이 추기경 사돌레토는 그때가 기회라 여기고서 제네바 시가 다시 어머니 로마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에 당황한 시당국은 대응할만한 인물을 찾다가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자 결국 어쩔 수 없이 칼빈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게 된다!(아마 나 같으면 솔직히 절대로 도와주지 않았을 것 같다)

칼빈이 이 요청을 받았을 때는 스트라스부르에서 그 도시의 개혁자 마르틴 부써에게 원숙한 목회적 지도력을 전수받는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의 교회에서 목회하며, 인생의 동반자도 맞이하여 모처럼 찾아온 삶의 행복을 그야말로 만끽하던 때였다. 이러한 칼빈에게 제네바 시당국으로부터 문제의 편지와 함께 도움의 요청이 당도한 것이다. 분명 옛 기억 때문에 섭섭한 마음에 한동안 고심하기는 했을 터였지만, 사태의 심각함 때문에 우리의 칼빈은 결국 펜을 들게 된다.

그렇게 작성된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보낸 답신은 편지형식지만, 종교개혁의 핵심교리들이 총망라된 일종의 신학논문이자, 종교개혁의 대의에 대한 개인적이고도 공적인 변증서이기도 하다. 칼빈은 추기경 사돌레토에게 단호하면서도 예의바르게, 분노하면서도 침착하게, 그리고 사적 동기와 자신의 생활에 대한 인간적인 변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의 기도를 담아 공적편지를 보냈다.

사돌레토는 제네바 시에 보낸 편지에서 로마교회의 분리와 종교개혁의 정당성에 대해 매우 교묘하면서도 부당한 의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어머니 로마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감정적인 호소를 통해 제네바 시와 교회를 상당히 난처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제네바 시에서 교회 개혁과 분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칼빈으로서는 이러한 내용 때문에라도 분노와 함께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칼빈의 답신을 읽어보면, 정통교회이자 어머니 교회로 여겨지던 로마교회와의 분리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종교개혁일로부터 무려 500여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 세대에는 로마교회와의 단절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리고 교회가 사분오열되는 역사의 진행을 이미 체험한 우리에게는 분리에 대한 일종의 무감각도 작용하겠지만, 그 첫걸음을 내딛었던 당사자 칼빈에게는 결코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무려 1,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흘려 내려오며 정통성을 이어오던 교회와의 단절, 모든 사회 속에 스며들고 삶마저 지배하던 시대적 전통과의 단절인데 얼마나 외롭고 처절하고 두려웠겠는가!

그래서 칼빈은 답신을 통해 자신들이 행했던 교회 개혁의 동기, 실제 정결하고 청렴한 사생활의 뒷받침까지 공개하면서까지 추기경에게 의분을 토해 내고 있다. 칼빈에게는 분리의 정당성 확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의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한 전체 종교개혁 진영의 존립 근거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칼빈은 매우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공적인 입장에서 개혁과 분리의 정당성을 이 편지에 천명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로마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진리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는 그 시대의 교회와 사회 앞에 자명한 사실이었다. 개혁자들과 칼빈의 눈에 로마교회는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잃었고, 그럴 의지조차도 없었다. 그러므로 개혁과 분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당했고, 과연 누가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지도 이제는 만천하에 자명해졌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려 나가시므로, 말씀을 떠나고 성령을 저버려 예배와 참된 경건을 부패시킨 로마교회와의 단절과 분리는 매우 합당한 일이었다.

칼빈과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의 원리에 충실하려는 것이었지, 사돌레토가 썼던 것처럼 결코 스스로 분리를 추구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원래 칼빈은 교회의 분리야말로 엄청난 죄악임을 알고 매우 두려워했던 인물이었다. 이 사실은 후일 취리히의 불링거 진영과의 합의를 통해, 또한 루터파 진영의 멜랑히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종교개혁 교회의 하나됨을 염원했던 칼빈의 행적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우리는 칼빈이 독일, 영국, 헝가리, 프랑스 등지에 보낸 수많은 편지를 통해서도 그가 결코 분리를 추구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오히려 교회 연합을 전심으로 추구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이 답신을 통해 자신들이 로마교회에 의해 부패된 교리와 성례 제도를 개혁했음을 분명히 선언한다. 그는 오직 세례와 성만찬 이 두 가지만을 주께서 친히 제정하신 교회의 성례로 인정한다. 그는 또한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두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통해 현재화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칼빈은 이 편지에서 루터만큼이나 확실하게 이신칭의의 교리를 선언한다.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인정받을 수 없다고 그는 역설한다. 그러나 칼빈이 선행을 결코 무시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선행이 하나님께 칭의를 받은 신자들의 당연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선행은 결코 로마진영이 주장하듯이 구원의 공로 내지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 칼빈이 짧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로마교회의 미신 숭배와 몇몇 악습만으로도 충분히 그 부패상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진리에 눈이 뜨인 칼빈이 개혁에 나서게 된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요 인도하심이었다. 편지 말미에 칼빈은 자신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복음에 완고하리만큼 저항했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개혁자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후 드려지고 있는 칼빈의 기도는 너무나도 절절하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가만히 앉아서 객관적으로만 읽을 수 없게 만들 정도이다. 함께 동참하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지금도 생생하게 울리는 개혁자의 탄원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하나님께서는 칼빈의 탄원에 응답하셔서 이후 그를 제네바로 복귀시키셨다. 그리고 제네바 시가 이후의 세대를 위한 굳건한 개혁의 초석을 놓도록 큰 복을 베푸셨다.

추기경 사돌레토에게 주는 이 편지는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상으로도 매우 훌륭하다. 비록 번역본이기는 하지만 칼빈의 수사적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오랜 울림을 남긴다. 치열했던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의 역사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과연 나는 종교개혁자의 후손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다시 한 번 겸허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주님 도우소서.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