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갈팡질팡하는 연약한 자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_ 박동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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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갈팡질팡하는 연약한 자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26:1-11

 

<박동근 목사 | 안양 한길교회>

 

신앙의 눈이 너무 희미해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조명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도 오판을 한다

위기 속에서 오류 없는 판단으로 생명의 길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해야

 

본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겪었던 시련과 그 속에서 저지른 실수와 비슷한 류가 이삭에게서도 발견됨을 본다. 인생이란 일종의 유사성이 있고 보편성이 있다. 고난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그렇고, 누구나 연약하고 죄성이 있어 고난 속에서 신앙인으로서 유지해야 할 품행에 있어 실수할 때가 있다. 그런 보편성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옛 일을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는 일이 이삭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긍정적인 면에서 선함의 스승이 되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면에서 반면교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사를 배우고 자신들의 조상들의 행사를 돌아본다. 사람은 사람에게 거울이다. 그래서 타인의 삶은 내게 좋은 점도 가르치고 저렇게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타인의 장점도 단점도 다 거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보편적이고 동일한 본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을 너무 과대평가하거나 너무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잘하는 점은 배우고 나쁜 점은 거울삼아 나의 교훈으로 삼으면 되는 것이다. 저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내 속에도 있기 마련이다.

 

  1. 이삭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고난과 은총 속의 보호를 받았다.

그 은총은 특별하고 특별한 섭리의 보호였다. 아브라함은 생전에 두 번의 기근을 만난 적이 있다. 극심한 기근이었다. 그래서 그는 두 번 기근을 피해 주거지를 옮겨야 했다. 1절에서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라고 말한 것은 두 번째, 곧 이삭의 기준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기근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삭도 아브라함이 겪었던 세파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다. 약속의 사람들이라고 보편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겪는 고난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브라함의 기사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약속의 백성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백성들은 그 고난 속에 내팽개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고난을 만날 때마다, 그의 신앙이 낙심하지 않도록, 혹은 고난 속에서 길을 잃고 낙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그에게 친히 현현하셨고 말씀하시므로 그의 심령과 생활의 진로를 지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영혼 없는 피조물이나 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을 넘어선 특별하고 특별한 섭리의 인도하심을 베푸신다. 이 위로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제일 서두에 고백한다.

♦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
–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십니다. 실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족장들에게 약속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요 순례자로서 지위 이상을 주지 않으셨다. 이방인의 땅에서 그들은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정처 없는 주거 생활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인도자가 되어주셨다. 2절에서 이런 위로가 보인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약속과 은총은 사람과 시대를 초월해 동일하게 역사한다. 아브라함은 죽어 하나님 품에 안식했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믿음은 이삭에게 주어졌고, 이삭은 그 믿음을 인해 아브라함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랑과 보호를 받는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이것이 우리의 위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현현하여 말씀하시듯, 이삭이 동일한 위기에 처했을 때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위기의 때, 고난의 때 사람은 갈팡질팡한다. 사람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하지? 방황할 수밖에 없다. 기근이 들어 모두 굶어죽게 되었을 때, 이삭과 그 믿음의 가정은 어디로 가야 살아갈 수 있을지 염려스럽고 혼돈스러웠을 것이다.

때로는 이런 상황에서 인간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애굽으로 가면 그들의 풍요를 구걸할 수 있겠지? 이처럼 고난과 위기의 때 인간은 염려하고 방황하고 좌절하고 혹은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적인 방법대로 판단하고 행할 위험이 있다. 우리의 신앙의 눈이 너무 희미해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조명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도 오판을 하게 된다.

아마 이삭도 이런 인간적인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는 일을 좋게 여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이삭에게 현현하셔서 말씀하신다. “애굽으로 가지 말고 그랄로 가라!” 그러므로 고난의 때, 환란의 때, 마음을 현란케 하는 시련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모든 일들을 인간적인 기준에서 세속의 방법대로 행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렇게 마음을 동요시키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진로와 갈 길을 차분히 물을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된 길로 접어들지 않도록 인도해주시며, 우리가 이 시련 속에서 진정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 피하는 일에 달렸음을 다시 한 번 마음에 확신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0: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다.

 

  1. 이런 보호 속에서 성도가 살아갈 이유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에 순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대로 살면 열매가 있고 선한 끝이 있으나 하나님께서 일러 주시는 길을 떠날 때, 우리는 낭패를 보고 좋지 않은 끝을 본다. 아브라함이 복 있는 자의 인생을 산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은택 때문이었고, 그 은택 속에서 주어진 신앙과 신앙이 불러일으키는 순종의 삶 때문이었다. 2절에서 5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말씀이 주어진다. 그는 애굽이 아닌 그랄에 거하여야 했다.

그리고 그가 믿고 순종할 때 받을 복을 전해주신다. 3절에서 이 땅에 거하면, 아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험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소명을 다하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택함과 부르심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생에 주어진 약속은 그가 가진 신앙으로 말미암아 순복하며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르는 언행을 통해 성취된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으로 의롭다하시고 자녀로 받으신 자들을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사랑하신 자녀에게 말씀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명령하신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되는 그런 것만을 명령하신다. 비록 우리 눈에 그렇지 않게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기에 명령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최선이며 우리에게 최선이다. 탕자는 자신의 부패한 본성을 따라 즐거움을 찾아다녔고, 아버지를 떠났지만, 아버지를 떠나 얻는 즐거움은 거짓된 즐거움이었고, 결국 절망하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이삭에게 신앙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기근이라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오류 없는 판단으로 이삭에게 복된 길, 생명의 길을 제시하신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여 순종하는 자는 좋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 신앙인이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보게 된다.

신앙 안에서 순복하므로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을 하나님 앞에 보인 이삭이었지만, 그도 완전하진 않았다. 우리가 믿고 순복한 것을 넘어 우리를 붙드시는 자비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허물어지고 정죄되고 말 것이다. 가장 큰 신앙의 승리 후에도 우리 자신의 행동을 공로화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도 흠이 있고, 그 흠을 넘어 여전히 붙드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결국 살게 됨을 알아야 한다. 이 부분은 아브라함이 애굽 바로와 블레셋의 아비멜렉 앞에 저지른 실수와 동일한 교훈을 준다.

이삭은 들을 귀가 있고, 거듭난 심령을 가져 신앙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했다. 하나님께서 지도해주신 길은 안전하고 복된 것을 알아 그렇게 순복했다. 더 크고 더 풍요로운 땅 애굽에 몸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랄 땅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삭의 이러한 신앙의 순복 이면에 연약함이 있다. 신앙이 없고 순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순종의 고무적인 태도 이면에 연약함이 여전히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이 행한 만큼 저울질하여 그를 대하셨다면, 그는 그의 아내의 일로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늘 그렇듯,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진 신앙과 불완전한 순종을 넘어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우리의 연약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심으로 부족함 가운데서도 여전히 지켜 주시고, 우리가 믿고 행한 것을 넘어선 자애로 지켜 주신다. 결국 우리는 그야말로 지극한 은총으로 황송한 자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