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인내 _ 현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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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인 내

<현창학 교수 | 합신, 구약학 | 본보 논설위원>

 

내 힘으로가 아니라 십자가 붙들고 오래, 끝까지 참는 것이

경건이요 성장이며 신앙의 승리이다

 

2년 전 미국 패서디나에 있는 풀러신학교에 몇 달 머무를 때 도서관 벽에 걸린 중국인 그리스도인이 쓴 휘호 하나를 보았다. “爲耶蘇百忍千想萬待”라는 휘호였다(우리 발음: 위야소백인천상만대). “예수를 위하여 백 번 참고, 천 번 생각하고, 만 번 기다린다”는 말이다. 관록 있는 신학교에 범상치 않은 휘호라 생각됐다. 예수를 믿는 것은 참고 참고 또 참는 일이라는 뜻이니 성화의 본질,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잘 표현한 말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인내라는 덕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선포하며 책을 시작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룰 때 그리스도인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perfect and complete, lacking in nothing [NASB]) 인격으로 성장하게 된다(1:4). 그리스도인의 인격 완성에 대한 얼마나 위대한 약속인가. 그리고 얼마나 구체적인 약속인가. 그렇게 우리가 마음에 소원하는 인격의 성장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참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성장하기 원하지만 그 길을 잘 모르는 수가 많다. 사랑, 용서, 이해, 양보 등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중요한 덕목들이지만 너무 포괄적이고 일반적이어서, 그리고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예 실천에 대한 엄두도 내어 보지 못하기가 일쑤다. 우리가 항상 실패하는 대목이다. 그에 비하면 인내는 구체적이며 매우 간단하다 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해 그냥 한 번 ‘참아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쉽진 않지만) 참는 행위 하나로 일단 인내가 실천된 것이다. 즐겨 참지 못하고 어쩌지 못해 참아도 그것은 귀한 가치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랑이건 용서건 첫발을 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가 인내를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참음을 한 번 두 번 자꾸 연습함으로 급기야 ‘참음의 기술’을 내 것이 되게 하자. 그러면 그 기술이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가장 소중한 기반이 되어 줄 것이다. 물론 마지못해 참는 수준을 넘어서고자 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우리는 십자가와 연합하여 사는 사람들이다. 십자가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미’이다. 십자가를 참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이다(히 12:2; 벧전 4:13). 의미로 참고, 보람으로 참고, 즐거움으로 참자. 기쁨이요 재미요 놀이로 생각하면 좋다. 참음은 즐거움이요 보람인 것이다.

오래 참고, 끝까지 참아야 한다. 죽을 것 같아도 참아야 한다. 혼자 참으면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십자가 붙들고 참으면 경건이다! 내 힘으로 버티면 병날 수 있지만 십자가 붙들고 참으면 주 안에서의 깊은 성장이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에 찰싹 붙어 있자. 기필코 도달하게 될 신앙의 승리가 여기에 있다.

참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며(출 34:6), 성령의 열매이며(갈 5:22, 24), 사랑이다(고전 13:4, 7). 온전한 인격인 것이다. 성장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괴로움인가. 오히려 참고 성장하는 것이 참지도 않고 성장도 않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일지 모른다. 의외로 가까운 데에 길이 있다. 참음이 성장의 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 불편한 일들이 주위에 많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크신 섭리, 사랑의 섭리를 믿고 ‘너그럽게’ 대하는 법을 배우자. 의식하여 힘쓰는 가운데 점차 ‘넓은 마음’에 이르게 된다. 의미로 참고 보람으로 참고 즐거움으로 참자. 괴로운 일이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다. 주 안에서 주와 더불어 참아 완전한 인격의 열매에 이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