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설교| 기도하는 자의 기쁨(시5:3) _ 셀더하위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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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설/교

 

기도하는 자의 기쁨 (시5:3)

 

<헤르만 셀더하위스 교수(Dr. Herman J. Selderhuis)  | 아펠도른신학대 총장>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기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처리하신다는 확신으로 내려놓는 것”

“기도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므로
어떤 상황에도 상관없는 기쁨을 갖게 한다”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가 초청한 해외 석학의 2019.11.1.
합신 경건회 설교를 함께 나눈다. – 편집자 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시편 5편에는 곤경에 처한 한 사람이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 거지처럼 도움을 간청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들어달라고 간청하는 다윗이 곤경에 처해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비난받고 모욕당하고 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다윗에게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변명거리가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이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언약의 하나님이다. 그는 아침에 울부짖고 있다. “주여, 아침에 나의 목소리를 들으소서.” 주께서 명령하시기를 매일 아침과 저녁에 희생 제물을 성전에 가져오라 하신다. 매일 아침 희생 제물로 시작하고 끝난다. 이 희생제물이 하나님과의 화목(평화)을 가져온다.

이는 죄와 죄책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 앞에 있는 죄책이다. 희생 제물은 선물이다. 내가 내 죄로 죽어야 하는데 내 대신 한 동물이 죽는다. 이런 것을 생각하며 이스라엘은 하루를 시작하고 끝낸다. 자기 죄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시작하고 끝낸다. 이것이 7절의 말씀이다.

주님의 그 풍성한 사랑에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간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들어간다. 그분과 이야기하기 위해 지금 들어가는 것이다. 그 길이 자유롭게 열렸기 때문이다. 희생제물이 드려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과 나 사이에는 가로막는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은 다윗이 성전에 들어가는 그 순간이다. 아침이 되면 그 모든 것이 당신에게 떠오른다. 하루가 시작되면 깨어나자마자 바로 여러 시험들이 다가오고 생활의 걱정거리들을 생각하게 된다. 하루란 ‘매일’이다. 매일 매일 잘못에 대한 감정과 함께 시작한다. “주님, 나의 잘못된 말과 그 생각과 행위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새롭게 해 주십시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날의 일들을 하나님 앞에 꺼내놓는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개역 개정이 ‘기도하고’로 번역한 이 ‘아라크’라는 단어는 번역자들에게 어떤 어려움을 준다. 이 문제를 잠깐 말씀드리겠다. 여기서 아라크(내려놓다)라는 것은 제사를 준비할 때 쓰는 용어이다. 제사장이 제단에 나무를 준비하며 내려놓을 때 쓰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똑 같은 단어가 어떤 처리 절차를 소개할 때도 사용된다. 한 사람이 재판장에게 가서 어떤 문제를 꺼내놓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재판장에게 말하고 공의를 요구한다.

나는 이 두 가지 의미 중에 어떤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진 않는다. 다윗은 자기의 상황을 하나님께 마치 재물처럼 가지고 간 것이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불의를 알고 있습니다. 내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주님의 용서를 또 알고 있습니다.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이 희생이 나에게 용서를 가져다줍니다. 그러기에 나는 당신이 나를 도우실 것을 바라나이다.”

여러분 들었는가? “나는 바라나이다. 그리고 봅니다.” 이것은 이제 어떻게 될지 한 번 보자 이런 말이 아니다, 이것은 아, 당신이 답을 갖고 있습니까? 그러면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의미도 아니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기대하며 예상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바라나이다’는 법적인 도움을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다. 거기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은혜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내 경우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류의 확신이 아니다. 주님께서 날 돌보시리라는 그 확신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이러한 자세이다. 하나님께 자기의 경우를 갖다 내려놓는 것이다. 권리에 대한 요구를 하면서 그러나 확신 가운데서 내려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일을 처리하시라는 그 권리를 가진 확신이다. 이것이 은혜의 권리이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주어진 권리이다. 이제 더 이상 동물의 제사는 드리지 않는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셨다. 형벌은 완전히 끝났다. 이젠 하나님께 가는 길이 열렸다.

한 인간이, 여러분과 내가 기도 중에 나아가서 주님께 말 할 수 있다. 주님 이것이 내 삶의 상황입니다, 내게 공의를 보여 주십시오, 내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내 편이 되어 주십시오. 나는 말할 수 있고 말해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위해 간구하시고 간청하시는 분이다. 내 변호사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 대목에서 여러분 모두에게 던지는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여러분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 여러분의 삶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가? 여러분은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이렇게 여러분의 잘못, 죄책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그 신실하심에 대해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신뢰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바라나이다. 이제 주님께서 그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제 제사장이 나무를 내려놓는다. 불을 붙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화목을 성취하시리라는 확신 가운데서 불을 붙인다.

여기 곤경에 처한 사람이 있다. 자기 상황을 재판장에게 가지고 간다. 재판장이 자기에게 선을 행하리라는 확신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이제 다시 좋아질 것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다시 좋아질 것이다. 이것이 신뢰이다. 나는 내 삶의 상황들을 갖고 있다. 나를 짓누르는 것들이다. 아침에 그것들을 주님께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일을 하러 간다. 그리고 나서야 신학교에 온다. 그리고 나서야 나의 길을 간다. 그리고 나서야 의사에게 간다. 그리고 나서야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리라는 신뢰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 신뢰는 어떤 확실한 긴장을 갖고 있다. ‘이것이 잘될까 안 될까’라는 그런 긴장이 아니다. 주님께서 언제 어떻게 이것을 좋게 만드실까? 그런 긴장이다. 이 신뢰의 모든 것은 약속과 연결되어 있다. “오, 주님!” 시인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 주님!” 여호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스스로 처음이 되신 그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아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하신 바로 그 언약이다. 은혜의 언약이다. 사랑의 언약이다.

이는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할례의 표와 인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약속의 하나님께서는 골고다의 피 외에는 더 이상의 피를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할례를 대신하여 세례가 있는 것이다. 세례는 은혜의 표이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인이다. 하나님의 표가 우리의 이마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그 모든 것이다. 우리가 필요한 그 모든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시작할 수 있다.

신뢰 가운데서 시작하는 그 삶이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끝내는 바로 이 날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셨다.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약속하셨다. 보여주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시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이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 진리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바로 약속에 따라 산다는 것이다. 이런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에서만 가능하다. 기도하는 삶에서만 가능하다. 아침과 저녁에 기도하는 삶에서만 가능하다. 파수대와 같은 그 기도의 삶에서만 가능하다.

기도가 파수대라는 의미는 기도하면서 우리는 어려움 위에서 그 어려움을 잠시 동안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을 향한 간구이다. 성령님께서 내게 용기와 힘을 주시도록 드리는 간구이다. 그런데 그 성령님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간구, 간청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신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신다. ‘바라나이다’라는 것은 바로 신뢰 가운데서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한다. 기도하면서 사는 삶이다.

기도에 ‘아멘’하는 것은 기쁨의 삶의 출발이다. 오늘 시편 5편은 오 주님!이라는 부르짖음과 함께 시작했다. 그리고 방패와 함께 끝을 맺는다. 한숨으로 시작하여 기쁨으로 끝을 맺는다. 주님을 바라는 것은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한다. 그러면 시편 5편의 끝에 문제들이 다 해결된 것인가? 아니다. 여전히 아침이다. 어떤 진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라는 그 방식에서 그 진보가 있는 것이다. 주님께 다 맡긴 것이다. 주님의 손에 다 맡겼다. 기도 중에 그것을 다 올려드렸다. 이 기쁨이라는 것은 ‘이제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야’라는 그런 종류의 기쁨은 아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그 기쁨이다.

이 기쁨은 작지 않다. 11절을 보라. 기쁨 즐거움을 말한다. 이것은 강하며 활력이 넘친다. 보라, 이것이 믿음의 비밀이다. 하나님을 찾음의 비밀이다. 여러분이 만일 주님과 함께 산다면 하루를 살 때. 우리 마음의 것들을 내려놓을 때 문제들이 해결됐다는 결과는 여전히 없지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볼 수 있는 것이 그렇게 없는데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그런 것이 없는데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그 감각이다. 이제 다 사라졌다는 그러한 감각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것을 주님께 다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용서에 대한 기쁨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라는 것을 확신할 때 여러분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위로자가 되심을 알 때 여러분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님을 바라나이다’는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한다. 나를 기다리는 그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신다는 그 기쁨이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 하든지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있는 나의 중보자시며 변호자시다. 내 삶이 얼마나 어렵든지 상관이 없다. 주님께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나를 도우시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외롭든지 상관이 없다. 주님과 함께 있고 홀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주님을 향하고 있다. 성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삶이다.

그런데 이 기쁨은 성전 밖에서도 흔적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내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기뻐한다. 그것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 또한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내 편이심을 내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부당함을 감당할 수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 또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기도하는 아침은 여러분의 마지막 아침일 수도 있다. 주님과 여러분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이 죽을 때도 행복할 수 있다.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자는 어떤 긴장이 있다. 이 긴장은 앞을 내다보고 죽음을 내다보았을 때의 그 긴장이다. 이별을 해야 할 때 그 슬픔의 긴장이다. 그러나 다시 볼 수 있다는 그 기쁨이다. 우리는 이 땅을 떠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환영을 받으리라는 그 기쁨이 있다. 질문을 드린다. 여러분에게서 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여러분의 동료와 친구들이 여러분이 아침에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여러분의 그 좋은 비밀들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여러분을 닮아가려고 부러워하는가? 아니면 “아, 그저 저 사람은 저렇게 한숨만 쉬고 있구나” 그런 것인가?

그런데 사실 여러분에게 이런 것을 촉구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살면 이 일이 당연히 발생하는 것이다. 주님께 자꾸만 이렇게 내려놓고 보여드리는 일이 습관이 될 때 이 일에 기쁨이 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물론 우리가 항상 웃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분명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기 때문에 그 기쁨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께서 약속 가운데서 이것을 확정하셨다. 주님을 바라는 자가 죄라든가 질병이라든가 죽음이 없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 때에 하루를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 그렇게 하면서 여러분은 살기도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