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가 교리 대체하는 ‘새관점’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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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 교리 대체하는 새관점을 반대한다.

 

새관점(NPP)은 통상 목적격으로 해석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갈 2:16)를 “예수의 신실함으로”라고 소유격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헬라어의 소유격이 목적격적 소유격으로도, 속격적 소유격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처음 루터가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한 이래로 종교개혁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해석을 해왔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법정적으로 전가되어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으로 믿음을 해석했다.

여기서 ‘전가’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분한 구원의 공로로써 그리스도의 순종과 형벌적 대속을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물론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가 자리하고 있고 이는 칼빈 신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다.

그런데 새관점은 이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라고 해석한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온전히 순종하고 형벌적 대속을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신실함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였으니 우리도 그 길을 따라 신실히 행함으로써 구원 얻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령의 연합케 하는 역사’가 전제되어 있다.

톰 라이트의 경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를 주해하면서 전자의 믿음을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후자의 믿음을 신자의 신실함으로 해석한다. 즉 그의 ‘믿음’에는 ‘언약에 신실함’이라는 행위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는 이전 세대에 모든 사람들이 실패했던 길을 신실하게 행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본을 따라 신실하게 삶으로 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성령의 연합케 하는 역사가 전제되지만, 믿음은 언약적 신실함이므로 칭의 역시 이 언약에 신실한 행위가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열매와 더불어 그 결실을 거두는 미래적 칭의 개념을 더하게 된다.

물론 성령으로 연합한 시점에 칭의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톰 라이트의 믿음 이해에는 ‘신실함’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이렇게 되면 전통적으로 종교개혁의 신학인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이신칭의’에 행위를 결부시키지 않는 것과는 달리, 그의 신학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던 시절, 즉 의화라고 불리던 종교개혁 이전 시기의 신학으로 회귀하게 된다.

새관점은 칭의 속에 성화의 요소로써 우리가 언약적 삶을 신실하게 사는 것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연합을 설정해 두고 있다. 대신에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개념 중 하나인 전가의 개념을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종교개혁 신학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 여기에는 또 다른 신학적 장치들이 있다.

곧 믿음은 우리 구원의 효력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공효, 곧 은혜를 받는 내적 방편이다. 그리고 이 내적 방편으로 외적 방편인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이 공효들을 공급받고 선행이라는 열매를 맺는 구조로 설명했다. 선행은 우리의 행위나 결단이나 노력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께 더 잘 붙어 있을 때, 곧 그리스도와 더 잘 연합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열매를 맺는 것으로 설명한다.

새관점의 언약적 신실함이라는 개념은 믿음이 결여하고 있는 행위를 믿음에 부여함으로써 믿음을 더 믿음 되게 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성령의 연합이라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기본적 구조가 예수의 신실함을 본받는 우리의 신실함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 편의 행위를 더 강조하게 되므로써 오히려 연합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이 오랫동안 인간의 부패에 대해 지적하고 이스라엘의 실패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구원론적 문제가 아니라 교회론적 문제로 만듦으로써 인간의 부패를 간과하고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따라 우리가 그것을 본받을 수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대로 전가 교리가 철저하게 구원의 공효를 그리스도 안에만 둠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만 그 공효가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도록 한 구조와 그 장치들, 예컨대 은혜의 방편과 믿음 그리고 거기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선행이라는 결실을 맺는다는 신학적 해석을 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이 새관점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신학이 현실과의 대화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원인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이신칭의’를 오해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행함 없는 믿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새관점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회의 ‘이신칭의’ 신학을 떠나 새관점이 제시하는 길로 갈아타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신학적 전통에 서 있는가를 명백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