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복음과 정교 분리 _ 김영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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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복음과 정교 분리

 

<김영재 박사  전 합신, 역사신학 교수>

 

교회는 국가와 명운을 같이하는 공동체임을 의식해서라도

거시적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나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6월 초에 어떤 목사가 현 정부에 대하여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잘 알려진 복음주의자 한 분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빙자하여 목사가 개인적으로 정부에 대하여 비판할 수는 있어도 기독교의 이름이나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부당하니 잠자코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교 분리”란 말의 뜻을 오늘의 상황에서 따지는 건 진부한 일일 수 있으나 그 말이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에 대하여 함구해야 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런 이해는 바로 잡아야 할 것 같아서 그 뜻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교 분리”는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그리고 정치권력과 교회 그 어느 쪽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로 적용되었다. 교회가 “정교 분리”를 말할 경우, 그것은 국가가 교회 일에 간섭하거나 교회를 탄압하지 말고 교회의 자유와 독립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선포이다.

반면에, 국가가 그것을 말할 경우, 그것은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거나 국가 정책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그랬듯이, 종교를 껄끄럽게 여기거나 압제하려는 북한이나 중국과 같은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권이 “정교 분리”를 말할 때 그것은 교회의 정치에 대한 불간섭을 전제로 할 뿐 아니라, 국가가 교회를 쇠퇴하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인의 정치적인 권리와 활동마저도 제한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 말하는 “정교 분리”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헌법에서 정교 분리를 명시한 것은 여러 교파 교회나 종교가 균등하게 신앙의 자유를 향유하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정교 분리”와 선교 전략

“정교 분리”는 우리나라에 복음과 함께 도입되었다.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아 억불정책을 시행해 왔으며 천주교를 새로운 외래 종교요, 사상이라고 배격하며 수많은 신자들을 처형하면서 쇄국정책을 견지해 오던 조선 정부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외세의 압박에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했다. 개신교 선교사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를 시작할 무렵에 조선 정부는 이들이 외세의 대변자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지고 대하였다. 선교사들은 복음 전도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정교 분리”를 내세워 자신들은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 전할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들은 국가가 내세우는 의미의 “정교 분리”로 정부에 순응하겠다고 자처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도 같은 말로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일제의 강압에 반기를 들고 싶어 하는 한국 신자들에게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도록 가르쳤다.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정교 분리”는 외래 종교를 거부하는 문화권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으로 적용되었다.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아 자유를 얻게 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19, 20세기 초에 선교사들은 순수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 이외에 의료 사업, 교육 등 문화 사업을 통하여 선교지에 문화를 전수함으로써 선교지에 많은 유익을 주었다. 외국 선교사가 이국에 와서 순수하게 영혼 구원의 복음만 전해야지 정치나 사회의 급격한 변혁을 바라거나 꾀하는 것은 월권이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은 영혼 구원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본래 가졌던 가치관과 세계관을 회복하게 해 준다. 즉, 복음은 현실 사회에서 사람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를 비롯한 여러 다른 자유들과 평등, 인권 등에 눈을 뜨게 해 준다.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일제 강점기에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남기 위해 선교사들이 가르친 “정교 분리”를 잠자코 따랐다. 그러나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선교사들 몰래 스스로 온 겨레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것을 당연히 할 만한 일을 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정치에 순응하는 한편 종교의 자유만 누린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정교 분리”는 복음 전파를 위한 전략이지 어떤 경우에도 범할 수 없는 철칙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 역사에서 보는 “정교 분리”

“정교 분리”는 4세기 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즉 국가 기관과 버금가는 기구로 성장하여 권세를 갖게 되면서부터 있게 된 긴 역사를 가진 말이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어느 지역 교회의 설립에 관여하려고 했을 때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가 “정교 분리”를 내세워 교회의 독립을 주창하며 황제의 교회 간섭을 거부했다.

정치와 교회의 유착으로 정치의 권세와 교회의 권세가 서로 우위를 다투던 중세에는 “정교 분리”란 말은 망각되었다. 16세기에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탄압하려는 중세 교회와 국가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자들은 국가가 교회와 하나가 되어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뜻에서 “정교 분리”를 내세웠다. 종교개혁 시대의 역사를 보면, 그것은 위그노의 혁명이라든지 화란의 독립 전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서는 무력에 호소하는 것도 불사한다는 대의명분이기도 했다.

 

로마서 13장의 말씀과 “정교 분리”

“정교 분리”를 정권에 대한 순응과 동의어로 아는 한국 교회의 이해는, 권세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므로 각 사람은 그들에게 복종하고 권세를 거스르지 말라고 엄히 명하는, 로마서 13장 1절과 2절의 말씀과 연계해서 이해한 데서 더 강화되었다. 3절 이하의 말씀은 권세자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징벌하고 치안을 유지함으로써 납세의 의무와 법을 준수하는 선량한 백성들을 보호하는 직무를 맡아 수행하는 자이므로 그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라고 말씀한다. 여기 국방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려면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국방은 필수이다.

권세자에게 복종하고 두려워하며 존경하라는 말씀은 많은 뜻을 함축한다. 기독교 신자들은 천국의 시민임과 동시에 각자가 살고 있는 나라의 국민이요 시민인데, 천국의 시민임을 앞세워 국민의 의무나 권리를 소홀히 하는 일 없이 국가에 대한 의무와 사회질서를 잘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가의 안위는 백성들의 삶이나 교회의 존립과 직결되어 있다. 국가가 건재할 때 교회의 존립이 보장되고, 정치권력이 교회에 호의적일 때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자유를 누렸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본다. 7세기에 팔레스타인과 중동과 북 이집트에 있던 나라들이 반기독교적인 이슬람에게 지배당하면서부터는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압제 아래 겨우 신앙의 명맥을 이어 왔을 뿐 교회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국가 권력이 기독교를 국교로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났다. 교회는 정치권력에 지배를 받고 이용되는 바람에 교회는 부패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혁을 시도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를 외침과 동시에 “정교 분리”를 내세웠다. 14세기와 15세기에 교회 개혁과 신앙의 자유를 개별적으로 외쳤던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후스는 이단으로 처형되고 개혁의 싹은 잘리고 말았다. 종교 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제후들의 보호와 후원을 받아 거세게 항거하며 피 흘리기까지 투쟁함으로써 개혁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다. 슈말칼덴 전쟁(1544-1545)과 그 다음 세기에 일어난 30년 전쟁은 신, 구교 제후들 간의 전쟁이었다. 종교개혁의 교회는 전쟁을 치르는 씁쓸한 곡절을 겪어 독일에서는 가톨릭과 버금가는 지역과 교세를 확보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교회 개혁을 도모한 위그노들이 가톨릭의 세력과 전쟁을 치렀으나 대등하게 대항할 만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되어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 반면에 가톨릭을 옹호하던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던 네덜란드는 독립전쟁에 승리함으로 인하여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

 

맺는 말

“정교 분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보면, 조선 정부와 일제 강점기에 선교사들이 선교 전략으로 적용하고 한국 교회에 가르친 “교회는 정치권력에 순응해야 한다”는 해석보다는 정치권력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과 신앙의 자유를 구가한 말”로 더 많이 이해되고 적용되었다. 독일 나치 정권은 자유주의 신학에 함몰된 교회 지도자들이 주도하여 조직한 “독일 그리스도인들”을 앞세워 독일 교회를 정권에 순응하는 어용 교회로 만들었다. 소수의 신자들로 구성된 “고백교회”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정교 분리”를 내세우며 교회의 독립을 선포하고 나치의 민족사회주의를 비판하며 히틀러의 우상화를 경고하였다. 종전 후 이들과 온 독일 교회는 다 같이 나치에 항거하지 못하고 굴종한 죄를 가슴을 치며 회개하였다.

1930년대 중반과 후반에 각각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결의한 한국의 소위 주류 교회인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는 예배에서 먼저 천황을 향한 동방요배와 신민선서, 전몰장병을 위한 묵념부터 하고 예배를 시작하였으며, 일제의 침략 전쟁을 위해 때때로 연보까지 해야 하는 처참하게 굴종하는 교회로 전락했다. 소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국 교회가 이해해 온 “정교 분리”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일제의 권력에 대항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장기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반기독교 정책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고 어떤 이는 자신들을 정죄하는 서슬이 시퍼런 일제의 법정에서 “일제는 반드시 망한다”고 일갈하기도 하였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이미 1930년대 초에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을 비판하고 장차 다가올 박해에 대비하도록 한국 교회에 경종을 울렸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남과 북으로 국토가 분단된 이후 남에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북에서는 공산당 일당 독제를 막기 위해 기독교 목사와 지도자들이 정당을 조직하였다. 공산당을 견제할 다른 정치 세력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이 나선 것이다. 1950년 북의 남침으로 존망의 기로에 섰던 대한민국은 미국을 위시한 UN의 파병과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피땀의 노력으로 최빈국에서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으로 경이롭게 성장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핵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하는 북의 전체주의 공산정권과 여전히 대치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그 어떤 정권이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헌법을 존중하지 않거나, 종교의 자유를 비롯한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제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지 않고 탄압하거나,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한다면서 부도덕한 범죄를 용인하거나, 치안에 진력하는 공권력을 우습게 아는 무법 행위를 방치하거나,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방에 만전을 기하지 않는다면, 기독신자들과 교회 지도자들도 국민과 함께 그러한 잘못을 지적하고 수정하도록 호소하고 필요하다면 저항하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에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동성애를 합법하려는 법안에는 그것이 성경 말씀에 위배되고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일 뿐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자연의 이치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여 적극 반대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교회는 국가와 명운을 같이하는 공동체임을 의식해서라도 좀 더 거시적으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며 나라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교회의 화합을 위하여 정치에 대하여 논평하는 말은 아껴야 한다. 그러나 국가와 국민이 비상한 위기에 처하게 된 그런 경우에 교인들을 돌보고 국민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가, 정교분리에 대한 편협하고 일방적인 이해 때문에, 그냥 침묵하고만 있으면, 그리고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된다면, 나라와 교회에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