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건적 서적 ‘하나 되는 기쁨’의 실태에 대한 소고
“우리 시대 기독학자들의 분별없는 활동을 우려하며”
< 공학영 ·‘부흥과개혁’카페운영자 >
“각종 기독교 서적과 자료들은 점점 넘쳐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점점 후퇴하는 이 시대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될 것”
우리 시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아는 것처럼 행세하며 진리를 어지럽히는 시대이다. 여러 가지 학문과 해석 방법을 동원해 성경을 연구하고 그 뜻을 풀어내는 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해석이 가장 정확하다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실상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종교 사상에 다름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성경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실상은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한 힐문에 직접 성경을 인용하시며 너희가 성경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는 말씀으로 그들의 외식(外飾)을 꾸짖으셨다.
사도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짓 선생의 거짓 가르침은 끊임없이 교회를 어지럽히며 성도를 미혹해 왔는데 베드로후서는 이에 대해 분명한 경고의 말씀을 베풀고 있다. 그 가운데 밝히고 있는 거짓 선생의 특색 중 하나는 ‘호색하는 것’인데 성도의 무리 가운데 여럿이 그들의 호색을 좇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고 있다(벧후 2:2). 또한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굳센 데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벧후 3:16-17).
1. 성경(聖經)은 성경(性經)인가?
최근 쾌락주의의 안경을 쓰고 성경(聖經)을 성경(性經)으로 해석하며 진리의 도를 훼방하는 기독학자가 있다. ‘최희열’이란 가명으로 ‘하나 되는 기쁨’(애영커뮤니케이션 발행)이란 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색욕거리로 전락시키는 참람한 주장을 전개해오다 얼마 전 스스로 실명을 공개하고 나선 그 학자는 놀랍게도 창조 과학과 기독교 세계관 운동으로 유명한 ‘양승훈’ 교수였다.
필자는 이와 관련해 지난 3월 12일 ‘한국기독교이단문제연구소’의 주관으로 열린 이단서적 ‘하나 되는 기쁨’의 실태에 대한 포럼 자료집을 읽게 되었고, 이를 통해 양승훈 교수의 위험한 성경관과 그에 동조하는 여러 기독학자와 기독단체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에 대한 교계와 언론의 질타와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양승훈 교수와 추천사를 쓴 정동섭 교수는 책의 내용에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형편 가운데 양승훈 교수는 문제의 본질마저 흐리고 있음을 본다.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본인의 저서에 대한 논란과 관련해 “성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이 불편해 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면서 “이 책은 결혼 바깥의 성이 아닌 부부간의 성을 다룬 책”임을 강조하며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문제의 본질이 ‘성(性)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성’을 어떻게 보느냐가 아닌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양승훈 교수의 성경관’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것이다.
쾌락주의와 인본주의에 함몰된 양승훈 교수의 성경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양승훈 교수의 성경을 보는 눈을 따라간다면 하나님의 구속사가 아닌 성도착 혹은 성중독 환자의 공상으로 함께 함몰되는 큰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성경은 공상이나 상상력으로 풀어가는 책이 아니다.
이런 위험한 성경관을 바탕으로 기독교 학문을 펴는 일은 비단 양승훈 교수뿐만이 아니다.
2. 우리 시대 기독학자들의 성경관, 이대로 괜찮은가?
성경의 뜻을 올바로 깨닫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양한 학문적 방법을 동원한 연구를 통해 마치 비밀을 캐내듯 밝힐 수 있다는 인식이 기독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것처럼 굳어버렸다.
여러 학문의 영역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바탕으로 종교적 업적을 이루어보려고 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과 지식의 실험대에 올려놓고 해부하는 작업을 벌이는데 그릇된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는 불신자의 사고와 다를 바 없다. 불신자들이 각종 학문적 지식을 동원해 성경을 파악하고 주석하며 강의하는 세태를 따라 기독학자들도 지식주의적 접근으로 성경을 파헤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이성주의적 사고가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전에 없던 창조과학과 같은 소위 ‘기독교 학문’이 급속도로 발달하며 공교회적 해석을 필요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교회는 말씀에 대한 경외심 없이 기독교 학문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갖가지 학문 놀음을 그저 구경꾼의 입장에서 바라만보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욕되게 하며 이성주의와 인본주의로 교회의 자태를 위협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시대 거짓 교회의 편만함이 많은 사람들을 속이며 참된 교회적 자태를 훼방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더욱 나은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막연하고 그릇된 이성적 사고가 오늘날 지구 환경과 전 세계를 멸망으로 인도해 가듯이, 교회 또한 각종 기독교 학문들의 발달이 말씀 이해와 교회적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한다면 망하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성경의 보급 및 각종 기독교 서적과 자료들은 점점 넘쳐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점점 후퇴하는 이 시대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거짓 선생과 거짓 가르침이 진리를 훼방하며 교회를 더욱 어지럽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분별하고 진리를 올바로 상속하는 일이 시급한 때이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태도가 중요하다.
기독학자의 이름으로 위험한 이단 사상을 교회 앞에 주장해 온 양승훈 교수는 “논쟁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기를 원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교계와 여러 신학자들의 공개적인 지적에 여전히 무반응에 가까운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당한 기독 학자의 태도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를 옹호하는 정동섭 교수와 여러 가정 사역 단체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성도의 기본 자세가 없이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자들이 오랫동안 익힌 종교적 삶은 그대로 세습되어 교회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말씀에 대한 경외심 없는 종교 행위만을 이어가게 하고 있다.
양승훈 교수와 정동섭 교수가 어느 교단, 어느 교회에 속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나 그들이 속한 교회가 건전하다면 그들에 대한 마땅한 권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말씀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며, 그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교회를 보호하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분별없는 기독 단체라면 몰라도 교회마저 그들을 옹호하며 감싸고자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인본주의적 종교 단체를 만들어 가겠다는 위험한 선언에 다름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양승훈 교수와 정동섭 교수가 속한 교회와 그 교회가 속한 교단에서는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하기를 바란다. 또한 그들이 몸담고 있는 신학교에서도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 표명과 적절한 대처가 있기를 바란다. 참된 공교회와 참된 공교회의 신학교를 이루고 있다면 이는 마땅한 바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도 보편교회의 회원으로서 이 일에 합당한 관심을 가지고 올바른 신앙의 상속과 교회의 순결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함께 구해 나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