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충실한 칼빈의 주장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_이승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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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탄생 500주년 기념 지상강좌(8)

성경에 충실한 칼빈의 주장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 칼빈은 교회 개혁에 관여하면서부터 교회의 예배를 성경이 말하는 요소
를 중심으로 정비해 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칼빈에 의하면 참된 경건은 결
국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규정된 대로의 적법한 예배”에로 우리를 이끌
어 가기 때문이다.
◈… 그 시기의 칼빈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을 존중한 그 동일한 태도를 
가지고 21세기의 다양한 문제 제기 앞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
며 그에 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개혁신학도들의 사명이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이해는 너무나도 
분명하여 이에 대한 다른 논의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 이외에는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가 없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성경이 최고의 권위라는 것이 과연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우리에게도 적용하는 것이다. 이 글에
서는 교리 문제와 예배 문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에서 칼빈이 성
경을 얼마나 존중하며 논의하는지를 드러내도록 하겠다.

1. 교리에 대한 성경의 권위

루터는 성경에 위반되는 요소만 교회의 전통에서 배제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
각했다. 반면에 칼빈과 개혁파 신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좀더 철저하게 전개해
서 신약 성경 유형의 원시 기독교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
서 칼빈은 루터보다 훨씬 더 성경의 권위를 포괄적으로 생각하며 그 가르침
에 종속하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바로 이런 입장에서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말하는 성경적 직분
들을 교회에 회복시키려고 하였다. 이 때 직분자들의 평등성에 대한 강조는 
성경의 원리를 중시하는 칼빈의 큰 강조점이었다. 
디도서 1장 5절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그때에는 사역자들 안에 그 누구도 다른 이들에 대해 권위를 가지지 않고 
더 높지 
않은 그럴 정도의 평등성이 있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Comm. 
Titus 1:5). 이와 같이 칼빈은 교회의 직분의 회복 문제에 대해서도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었다.
칼빈이 교회에서의 치리를 강조하는 것도 성경의 권위를 따른 것이었다. 그
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과 주의 만찬이 황폐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교회 안의 다른 사람마저 부패되는 것을 방지하고, 죄인들을 회개
에로 이끌기 위해서 치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Inst. 4. 12. 5). 
그러나 이런 치리를 강조할 때 한편으로는 천주교회의 관습을 반대하면서 성
경의 가르침 밖으로 나아가 사제적으로 치리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또 한편으로는 재세례파 사람들의 여러 훈련들에도 반대하였으니 그들이 성
경적으로 바르지 않은 것을 성경적으로 바르지 않은 태도로 시행하려 한다
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례전에 대해서도 신약 성경에서 세례와 성찬 외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의
식을 은총으로 주셨다는 암시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칼빈을 강조한다. 칼
빈이 천주교회의 칠성례 가운데서 세례와 성찬만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배
제한 이
유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칼빈은 교부들의 견해를 언급하기도 한다. 교회의 옛 
교부들도 다른 의식에 대해 성례라는 명칭을 준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교부들의 의견의 차이도 언급하면서 교부들의 의견들 가운데
서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것만을 의미 있고 존중할 것으로 언급하고 있
다. 
이는 성찬 문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칼빈이 교부들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언
급하는 방식이다. 그는 항상 교부들의 해석 가운데서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
는 하는 것은 권위 있는 것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교부들의 의견 가운데 성
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있는 것은 언급하지 않거나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세례 양식에 있어서도 칼빈의 기본적인 견해는 신약 성경의 단순한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수세기 동안 이 관습에 덧붙여진 장식적 요소들을 제거해
야 한다는 것이다. 
성찬에 대해서도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의 성찬 제정의 말씀과 이에 더하
여 나오는 27-29절을 강조하면서 성찬을 합당하게 행해야 함을 강조하고 성
찬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하였다. 이와 같이 회중들
은 사
도가 그리하라고 한 바와 같이 스스로를 살피라는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동
시에 칼빈은 성도들로 하여금 천상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마음을 들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이와 같이 칼빈은 교회의 모든 것도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근거해서만 통제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성경의 가르침, 특히 신약 성경의 가
르침이 신약 교회의 모든 것에 대한 지침으로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 아주 실제적으로 
우리들에 대한 지침이 되어야 만 실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귀하
게 여기는 것이라고 보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성경의 가
르침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다고 해야 한다.

2. 예배 문제에서 성경의 권위 

칼빈에 의하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과 예배로 
“그들의 존재 전체와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하나님께 갚아드림으로써” 하
나님께 드린다(Inst, 4. 18. 13).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는 칼빈은 교회 개혁에 관여하면서부터 교회의 예배를 
성경이 말하는 요소를 중심으로 정비해 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칼빈에 의
하면 참된 경건은 결국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규정된 대로의 적법한 예
배”에로 우리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Inst. 1. 2. 2).
그 중 하나가 예배 중에 회중 찬송을 도입한 것이다. 이를 위해 칼빈은 자신
이 친히 시편을 운율에 맞게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하였고 당대의 프랑스 최
고의 시인으로 불리던 마로(Clement Marot)의 운율적 번역을 사용하여 찬송
케 하기도 했다. 
칼빈은 이미 제네바의 1537년 규례(the Article of 1537)에서 “시편들은 우
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올려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찬양으로 그의 이름의 영
광을 부르며 높이며 열심있게 할 수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Klaas Runia, 
“The Reformed Liturgy in the Dutch Tradition,” in Worship: Adoration 
and Action: 100). 
1539년에 칼빈은 불어 시편 찬송 초판을 발행하였는데, 여기엔 18편의 시편
(이전에 사용된 시편 46, 25, 36, 91, 138편과 마로에 의해 운율적으로 재번
역된 시편 1, 2, 3, 15, 19, 32, 51, 103, 114, 130, 137, 그리고 143)과 3
편의 영창(canticles)이 실렸고, 이 중 7편은 칼빈이 친히 번역했다고 한
다. 
이 시편 찬송들이 후에 제네바 시편 찬송(the great Genevan Psalter, 
1562)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1543년판에는 49편의 찬송이 실렸는데 여기에는 이전에 사용되던 (그러나 개
정되고 보강된) 30편의 시편과 시므온의 노래, 십계명 찬송, 사도 신경 찬
송, 주기도문 찬송, 천사들의 찬송, 그리고 성찬 전후에 부를 찬송 등이 실
렸다. 그리하여 시편 찬송은 핍박받는 위그노들의 특성이 되었다. 
물론 개신 교회는 시편만을 부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후
대의 규정적 원리는 시편만을 고집하고 나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지나치게 
나간 것은 문제이지만, “시편의 하나님 중심적 경건의 풍성함이 개신교적 
헌신을 특징 짖도록 했다”는 말은 참된 것이다(Clowney, Presbyterian 
Worship, 118). 
1538년 제네바에서 축출된 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 피난민 교
회를 목회 하면서 1538년 11월에 처음으로 그 피난민 교회의 성례를 수종들
과 그 뒤로는 한달에 한번씩 성찬을 시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1541년 제네바
로 다시 왔을 때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셔(Bucer)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사용
된 예배 식순을 채용하
여 제네바 예배식을 제안하고 실천하였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트라스부르크의 예배 형식을 취하여 그 상
당한 부분을 빌어썼다.”(John M. Barkley, The Worship of the Reformed 
Church [London: Lutterworth, 1966], 17). 
이는 그가 1542년에 낸 “초대 교회의 관례에 따른 기도 형태와 성례 집례 
방식”에 나타나 있는 다음과 같은 순서의 제안에 잘 나타나고 있다(W. D. 
Maxwell, The Liturgical Portions of the Genevan Service Book [New 
York: Oliver and Boyd, 1931], 114-15).<표1>

그러므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셔(Bucer)를 따르면서 중세에 존재하
게 된 요소들과 의식들을 거의 모두 완전하게 버렸지만 “예배 의식의 전통
적 형태를 조심스럽게 유지했다”는 하게만의 말(Hageman, Pulpit and 
Table, 16)에 우리는 상당히 동의할 수 있다. 그 때 기준이 된 것이 성경이 
말하는 원리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경에 나타난 요소만을 사용하여 예배 
순서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와 같이 예배 전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예
배 중에 선포되는 설교에 대해
서도 칼빈은 매우 성경에 근거한 입장을 표명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가르치
는 목사의 설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만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돕기 위해서 해석자들과 교사들을 우리들에게 더해 주셨다. 바로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천사가 아니라 빌립을 선택해 
보내신 것이다”(Comm. Acts 8:31). 
그처럼 교회에 보내진 성경 해석자와 교사가 목사이다. 칼빈은 목사의 직무
가 근본적으로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임을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목사
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천상적 교리”를 선포할 때 그는 바로 “하나
님의 입”이라고 언급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목소리가 울리 퍼지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입과 혀
에로 당신님의 낮추시기로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사요 특권인 것이다
(Inst. 4. 1. 5). 성경 해석과 선포를 강조한 것도 결국 성경의 권위가 칼빈
의 생각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 준다.

3.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서의
성경의 권위

사실 
칼빈의 궁극적 관심 중의 하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신실
한 그리스도인들로 살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좬기독교 강요좭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양을 확대하여 간 것도 “기독교 
교리의 끊임없는 조직화가 되기보다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기독교인으로
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안내서가 되기를 바랐다”는 곤잘레
스의 관찰은(Gonzalez, 235) 정확한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에게 구체적
으로 도움을 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에 사
로잡혀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고 그것을 세우려고 해야
만 한다는 것을 칼빈은 아주 잘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칼빈은 천주교 추기경 사돌레트(Sadolet, 1477-1547)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간 사상을 자기 자신에게 국한 시켜
서 자기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세우는 것이라는 일차적인 동기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건전한 신학이 못됩니다. 우리는 나 자신보다는 하나님
을 위하여 거듭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자기 영혼의 

원을 추구하거나 거기서 안주하는 것 이상으로 올라가는 데 있습니다.”
(Calvin, Reply to Sadolet (LCC, 22: 228), cited in Gonzales, 236, n. 
173).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방식을 오직 성경에서 정확하고 
바르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율법의 제3의 용법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은 바로 이런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율법의 교훈적 또는 신학적 용도를 율법의 “정당하고 가장 중요한 용도”
로 여기는 루터나 멜랑흐톤에 비해서, 칼빈은 이 제3의 용도를 율법의 가장 
“가장 중요한 용도”로 언급하고 있다(Inst. 2. 7. 12). 그러므로 구약 율
법을 비록해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교훈적인 뜻은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삶의 규범(rule of life)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칼
빈은 분명히 한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의 가변적인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가르침 받고 있는 것이다”(Inst. 3. 8. 4). 그
런데 “율법의 규례들은 … 하나님의 뜻을 다 포함하고 있고”(Inst. 1. 
17. 2), “하나님께서는 율법 가운데서 당신
님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다”
(Inst. 2. 8. 59). 
따라서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에 우리 눈앞에 제시되고 있으며(Comm. Jer. 
9:15),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당신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
을 제시하셨고, 요약하자면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모든 것을 제시하신 것이
다”(Comm. Isaiah 8:20).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여 그 정신에 따라 구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하며, 그런 바른 해석 작업의 좋은 토
대를 제공하고 그런 해석의 예와 그에 근거한 삶의 규범을 잘 제시하는 작업
을 해주었다. 
이런 해석에 의해서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칙이 그저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님이 잘 드러난다. 칼빈은 율법을 잘 해석
하여 그 율법의 정신에 따라 살 것을 보여 주고 그것을 신약, 특히 예수님
의 말씀과 연관시켜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그에 대한 “제일 좋은 해석자인 그리스
도”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Inst. 2. 8. 7). 칼빈에게 있어
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정신 자체”요(Comm. Acts. 7:30), 그 
생명이니
(Comm, 2 Cor. 3:16), 성경이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는 율법의 성취(목표
요 마침)이기 때문이다(Inst. 2. 7. 2; Calvin, Comm. Rom. 10:4.). 
그리하여 칼빈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기괴한 규범을 도출시키지 
않고, 부정적으로 표현된 것으로부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함의까지를 이끌
어 내어 제시한다(Inst. 2. 8. 8). 

마치는 말

이상의 논의는 칼빈에게 있어서는 매우 자명한 것을 드러낸 것이다. 칼빈에
게 있어서 성경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실질적
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어 본 것이다. 칼빈의 이
런 성경에 대한 존중을 부인하기는 매우 어려우므로 칼빈이 그 당시에 이런 
존중을 성경에 나타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이 전통은 개혁파 신앙고백서에 그대로 반영되어서 1559년 프랑스 신앙고백
서에서는 성경을 “우리 신앙의 분명한 규범”(sure rule of our faith)이라
고 하고, 1561년 벨직 신앙고백서는 “이 무오한 규칙”(this infallible 
rule)이라고 하고,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1566)에서는 “신앙과 사랑의 규
칙” 
(the rule of faith and love)이라고 하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1647)에서는 “신앙과 순종의 유일한 규칙”(the only rule of faith and 
obedience)이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성경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며 그 온전한 권위를 잘 드러낸 전통인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기독교회에서조차도 (실
천적 교계와 신학계에서서 조차도) 성경에 대해서 칼빈과 같이 온전한 하나
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견지되는 일이 매우 드물다는 데에 있다. 
성경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흥기하여 칼빈과 같은 성경에 대한 소위 비판 이
전적 접근(pre-critical approach)를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시기
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기서 과연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칼빈을 
그저 교회사적 주제로만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시대에도 살아 있는 교
회적 목소리로 여기는 것인지가 나뉘어 질 것이다. 
역사적 관심으로 칼빈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였다는 것을 객관
적으로 잘 드러내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60년대 이후로 나타난 
바르트주의적 칼빈 해석에 반하여 칼빈
의 성경을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를 
잘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작업이 여기에서 멈춘다면 객관적으로 칼빈의 성경관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으로 잘 드러내어 놓고서도 그것은 16세기적 태도로
만 치부해 버릴 위험성이 없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 16세기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
면서 기독교 전반에 잘 드러낸 칼빈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하나님
께서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까지 
나아가지 않을 때 우리는 칼빈을 16세기에 속한 인물로만 머물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시기의 칼빈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을 존중한 그 동일한 태도를 가지
고 21세기의 다양한 문제 제기 앞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며 그
에 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개혁신학도들의 사명이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이 시기에도 인정하는 것이며 진정 칼빈
을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작업이 매우 드문 것을 안타
깝게 여기면서 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으
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
것은 오늘날 급증하고 있는 형식적으로는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
격을 인정하되, 기능적으로 그것을 부인하는 다양한 견해들을 배제해 나가
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① 바르트주의적으로 성경비평을 용인하면서 성경의 하나님 말
씀됨을 주장하는 것, ② 성경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용인하면서 정경으로서
의 최종 본문인 성경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요구하는 정경
적 접근, 또는 ③ 성경의 하나님의 객관적 말씀됨을 주장하면서도 해석학적
인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해석학적인 상대주의를 용인하는 것 
등이다. 
우리들의 해석들은 모두 다 제한된 해석이므로 궁극적으로 바른 성경해석에 
대한 궁극적인 말을 할 수 없다는 성경해석학적 궁극적 의미유명론의 주장 
등이 시사하는 실질적 성경 무시의 태도를 배제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는 바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