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과 함께 걷는 목회자_박영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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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교직자 수련회 주제강의

지난 5월 11일-14일,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목회자”라는 주제로 총회
교육부가 주최한 총회교직자 수련회에 참석치 못한 교직자들을 위해 주제강
의 중 셋째 날 강의를 요약해 게재한다_<편집자 주>

성령님과 함께 걷는 목회자

박영돈 목사_고려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페
리파테오라는 헬라어 동사가 사용되었는데요, 직역을 하면 성령과 함께 걸으
라는 말입니다. 창 5:24절에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는
데 거기에도 ‘걷다’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3년 동안도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기가 힘든데 어떻게 에녹은 300년이
나 하나님과 함께 걸을 수 있었는지 그의 탁월한 신앙이 한편으로는 부럽기
도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런 탁월한 신앙 앞에 기가 죽게 되
는 우리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에
녹이 미처 누리지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더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성령
의 임재를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1. 구약에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

구약에도 성령이 임재하셨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
에야 성령이 임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순절까지는 
우리 주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
문에 요 7:39절에 말씀처럼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성령으로는 아직 임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에는 선재하
신 예수님이 함께하는 성령이 구약성도들 안에 임재하셨고 역사했다고 볼 수
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전의 개념이 점점 변천되고 있는데요, 성막에서 성전으로 발전되
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성전보다 크신 이 곧 예수님이 온전한 의미에서 
성전이 되셨습니다. 이동 성전이셨습니다. 성전의 두 가지 핵심적 요소는,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것이죠. 예수님의 육체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거하시고 그 영광이 반영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또 다른 요소는 제사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몸을 희생제물
로 삼으셔서 영원한 제물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성전과 
제사 제도를 이제 폐지시키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 2:19절에서 이렇
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
라.” 성전된 자기의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성전된 예
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죽이면 그 성전을 허물면, 우리 주님께서 삼일 만
에 부활하셔서 새로운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세우시는 성전이 바로 교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엡 2:21에 교회를 새로운 성전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엡 5:18절에서 그런 맥락 속에서 새로운 성전인 교회, 과거 구
약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처럼 성령이 가득해야 한다, 충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세상 사람들 눈에 보일 때는 
아주 보잘것없고 하찮해 보일지 모르는 공동체이지만,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
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게 임재하는 새로운 
더 영광스런 성전입니다. 
교회가 성전일뿐 아니
라 바울 사도는 우리가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
에 소속된 모든 개인 신자가 또한 성령님이 거한 성전입니다. 이것이 굉장
히 획기적인 개념인데요, 우리는 이것을 너무 많이 들어서 당연시 생각하고 
있는데요, 만약에 우리가 구약에 살았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성전이라
고 말했다면 그 사람은 아마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참람한 죄, 신성 
모독죄를 범한 것이죠. 
구약 성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런 특권이 오순절 후에 사는 하나님 나
라가 성령 안에 사는 우리들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
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이동성전이라는 사실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신약
의 경건의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성막과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그 공동체 가운
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상징입니다.”

2. 성령의 임재와 신자의 삶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에 거하고 있습니다. 구약
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보다 더 거룩한 곳에 항
상 살고 있습니다. 이 성령의 임재가 우리가 행하는 성스러운 일뿐 아니라 

우리들의 세속적인 잡다한 일까지 다 거룩한 것이 되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 외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망각하고 무시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순간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 있습
니다. 내 앞에 마이크가 있는 것, 내 앞에 사람들이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 우리들이 성령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일어난 영원불변의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
역으로 말미암아 실현된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느낌이 어떻든지 간
에 우리들의 변덕스런 감정이 하나님이 멀리 떨어진 것 같다고 아우성칠 때
도 우리는 믿음으로 이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며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좇아서 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코람데오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의 경건의 핵심은 1인 청중 앞에 선 것처럼 항상 살아가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많은 군중 앞에서도 한분만을 의식하며 살아가며 나 홀로 있
을 때에도 한분을 의식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한결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
니다. 우리
가 가장 중요한 이런 경건훈련, 하나님의 임재사실을 의식하고 그
리고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려고 하는 훈련들을 우리가 분주한 삶 속에서 
소홀히 하고 살아가고 있는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성령을 좇아 걷는다는 말씀에서 ‘걷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듯이 매일 일상
적인 일 속에서 성령님과 함께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때는 제
멋대로 살다가 우리가 필요할 때만 성령의 임재를 구할 때가 많습니다. 평상
시는 성령을 따라서 조심스럽게 살지 않다가 설교하기 전에 우리들이 발작적
으로 기도해서 성령의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일수록 성령을 팔아서 사기치려는 일들이 많아져 갑니
다. 성령을 우리가 사랑하고 순종해야 할 인격적 대상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마음대로 끌어당겨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영향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입으로는 비록 삼위일체를 고백할지라도 실제로 성령의 인격성을 현저히 무
시하는 이위론자, 이단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붕괴하
는 심각한 범죄 행위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사

들에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
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주의 일을 행하는데 능력과 은사를 구했지 매일의 
삶속에서 인격적인 임재와 교제는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평상시는 생명
의 성령의 법을 거스리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거스리는 삶이 바로 불법을 행하는 삶입니다. 우리에게
도 이런 거짓 선지자와 종교적 사기꾼의 유사한 특성들이 나타날 때가 있습
니다. 그 확실한 증거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열매로 알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이 될 때 우리가 전하
는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우리 전인의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열매와 신자의 자유

성령의 열매는 주의 일을 할 때만 능력과 은혜를 체험해서는 열리지 않습니
다. 평상시에 매일의 삶 속에서 조심스럽게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만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
는다는 것은 은밀한 삶 속에서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고 오히려 
성령을 거스리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산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
다. 
갈 5:22절에 열거되는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것은 구속의 목적과 직결된 것
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 사람을 창조하는 것이 성경에 분명히 계
시된 삼위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이고 경륜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새 언약의 피를 흘리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
으셨고 성령이 우리 안에 새 언약을 실현시켜 주시는 능력의 영으로 내주하
셔서 지금 강력하게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 성령의 열매를 맺히지 못하면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이 
우리 안에 이뤄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효력이 우리 안에 이뤄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성령
을 현저하게 거스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무율법주의와 율법주의라는 두 극단에 대항해
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경건의 열매를 맺는 성황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할 정도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자유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사도가 역설하
는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인 동시에 또한 무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
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율법주의에 대항해서는 할례 같은 율법의 규례로부터
의 자유,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헛된 수고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무율법주의에 대응해서는 율법을 팽개치고 제멋대로 사
는 방종과 불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동시에 더 적극적으로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던 유대인들은 유대전통을 고집하던 크리스천들은 율법
의 틀을 깨뜨리면 도덕적 해이와 무질서를 초래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러
나 바울은 율법의 틀보다는 성령의 자유가 훨씬 더 효과적으로 윤리적인 방
종을 막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율법의 참된 요구를 이루는 경건
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적 노력과 열심히 이룬 경건은 아주 경직되고 도덕적이고 음울하고 성령
의 자유함 가운데 맺은 성령의 
열매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성령의 열
매를 열거함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틀은 외부적으로 우리를 압박하
고 강요하지만 그러나 경건한 삶과 순종의 원천인 우리 마음은 새롭게 해 주
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수 있게 해 주지는 못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율법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을 이루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실이 우리 안에서 실제
적으로 체험될 수 있는 능력을 부요한 은혜로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십니
다.”

4. 성령의 능력따라 사는 신자의 삶

성령은 새언약의 영입니다. 새언약은 우리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과 똑같
은 요구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그 요구를 이루어주
는 은혜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들의 완고한 불순종의 마음을 할례해서 하나
님의 법을 순종하는 그런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것이 새 
언약의 내용이죠. 하나님의 법을 우리 심비에 심어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심어준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것
을 우리의 마음이 간절히 원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상태로 우
리 마음판을 갈아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주신
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할례를 받고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기 전에 우리들의 육신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혐오하는 완고한 마음
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대상을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명령만큼 우리들에게 곤
혹스러운 요구는 없을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
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혁신되었기 때
문에 내가 가장 원하는 것, 내가 가장 바라는 것, 내 마음이 진정 사모하는 
것을 율법이 행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나뉘어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합니다. 우
리들의 분열된 마음, 육신의 소욕을 따르기도 원하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
도 원하고, 그래서 두 사이에서 항상 머뭇거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항상 온전
히 행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분열된 마음을 치유하여 주
셔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의미에
서 자유입니다. 하나만을 온전히 마음으로 좇을 수 있는 자유가 성령께서 주
시는 자유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바울 사도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4절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롬 6:6의 말씀과는 아주 다릅니다. 롬 6:6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우리들에게 객관적, 수동적으로 이뤄진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4절에서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
이 능동적으로 행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수
동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들이 능동적으로 그 일을 행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실이 우리 안에서 실제적
으로 체험될 수 있는 능력을 부요한 은혜로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십니다. 그
래서 그 믿음을 통해서, 그 능력을 따라서 우리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 일어
난 객관적 사실이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주관적으로 체험될 수 있도록 그 

능력을 의존해서 우리들의 육신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런 적극적인 성
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자존감이 너무 낮은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상
이 너무 빈곤합니다. 땅에 속한 세상 사람들의 수준을 훨씬 능가할 만큼 우
리들의 자존감이 높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땅의 것을 추구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는 말

바울 사도는 롬 5:5에서 이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
니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고 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과 영광만을 바라고 주를 위해 살 때 세상에
서 전혀 인정을 못 받을 수가 있고 오히려 세상적 기준으로 실패자, 낙오자
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위축되고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과
연 내가 바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하나님 영광이라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망상을 지금 좇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한 내적 갈등을 겪을 수가 있습니
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이 소망이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
을 그의 은혜로 때를 따라 우리에
게 확신시켜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너는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부요한 의식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들이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서 듣게 될 종말론적 칭찬과 인정을 미리 세미한 음성으로 우
리 귀에 들려주십니다. ‘착한 종아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인정하노라 
내가 기뻐하노라.’ 
이런 성령님의 위로가 간간히 우리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를 움
직이고 우리의 열심을 자극하는 최고의 모티브가 되고 동력이 되는 것입니
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성령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삶
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영광과 비전에 의해서 우리들의 마음이 매료되고 하늘의 능력
으로 덧입음을 받아서 이 어두운 이 땅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하늘
의 풍성함을 이 땅에 전달하는 그러한 사역을 감당하는 그런 우리 동역자들
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