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코스에 대한 평가_김병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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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코스와 개혁교회 3

최근 알파코리아와 관련된 논란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에 지난 5월 19
일 총회신학위원회와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주최‘장로교 신학적 입장에서 
본 알파코리아 세미나’에서 발표된 김병훈 교수의 글을 ‘알파코스와 개혁
교회’란 제목으로 3회 연재한다. |편집자주|

알파코스에 대한 평가

김병훈 교수_합신 조직신학

“방언·예언·신유 등 초자연적 체험을 신앙고백의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
하는 것은 신비적 주관주의 뉴에이지 철학과 같아”

▣… 빈야드식 성령 체험이 알파의 핵심적 요소
▣… 말씀에 따른 영적인 각성만이 성령의 사역
▣… 기도와 찬양, 헌신 등 경건의 총합 이뤄야

“개혁주의는 객관적 말씀의 진리 통해 복음을 전파하며 자기학습과 신학
적 해석아래 은혜의 각성 추구해”

1. 알파코스는 빈야드식의 체험우선주의

알파코스를 전파하는 사람들은 알파코스가 단지 전도의 한 방편일 뿐이라
고 
강변을 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의 전도 방편인 알파코스를 신학적으
로 비평하는 것은 결코 적절한 접근이 아니며, 오늘날과 같이 전도가 어려
운 시대에 전도의 좋은 방편을 격려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의 전도방법으로서의 알파코스가 갖는 문제점은 그것이 철저히 
‘체험에 기초한 증거주의’를 방법론적 전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니키 검블
은 이러한 전제를 추구하는 까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한다.

– 계몽주의 시대에는 이성이 최고봉에 있어 모든 것을 다스리고 논리적 설명
을 통하여 체험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여러 문화가 ‘함께 어울리는’
(pick-and-mix) 세계관을 가진 현재의 문화적 변이과정에서는 뉴에이지 운동
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체험을 통하여 논리적 설명에 이르게 한다. (알파코
스 운영방법, 55)

검블의 생각에, 오늘의 세계관은 이성을 기초로 하는 논리적 설명을 통하여 
진리를 수납하고 그 진리를 체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체험을 통하
여 진리를 수납하고 논리적 설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따른다. 
그는 이러한 현대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하나님을 체험케 
하는 구체적인 방식
을 사용하는 전도가 오늘날에는 요구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알파코스라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 방법론적 전제에 따라서 알파코스가 어떠한 열매를 맺
고 있는지에 대해 검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코스 마지막에 나는 설문지를 모두 나눠주고 코스 시작 전에 크리스천이었
는지 아닌지, 그리고 지금 그들 자신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 지에 대해 묻는
다. 만일 어떤 변화가 있다면 나는 그 변화가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 묻는
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은 주말 수양회 토요일 저녁이
다 … 토요일 저녁 순서를 마친 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의 노래로 
응답한다. 때때로 우리는 방언으로 찬양드린다.” (알파코스 운영방법, 194-
195)

“결정적인 순간은 주말 수양회 토요일 저녁이다”는 검블의 말은 알파코스
가 결국 회심의 기초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에 대해 말해 준다. 알파코스의 
주말 수양회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방언, 예언과 지식의 은사의 실
행을 통한 치유의 역사를 체험하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을 고백케 하는 결정적인 순
간이 주말 수양회 저
녁이라는 말은 바로 방언, 예언, 신유 등의 초자연적인 신령한 체험이 신앙
을 고백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은 많은 위태로움을 내포한다. 사실, ‘체험을 통하
여 설명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뉴에이지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관점이다. 
이미 빈야드식 은사주의 운동에서 보는 바처럼, ‘토론토 체험’ 같은 것들
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게 보다는 신비주의적이며 감정과 감흥에 치우치
는 주관적 상황에 이끌리게 한다. 주말 수양회에서 방언을 스스로 하지 못하
는 사람들에게는 방언을 따라하도록 하여 흉내를 낸 방언으로 찬양을 하도
록 하는 것 등도 바로 이러한 사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이다. 
그렇다면 결국 알파코스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체험을 하도록 이끌어 
가기 위한 하나의 예비적 사역을 담당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말하자면 알
파코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각성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지식이 굴절되어 있거나 또는 결핍되어 있는 상태에서 
신비한 체험에로 나아가도록 이끌어갈 우려가 심대한 것이다. 
알파코스는 
사도시대의 은사들이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사도들의 복음전파가 지금도 유효하게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주
장하지만, 사도들의 복음전도는 알파코스와는 전혀 다르게 철저히 성경 말씀
에 대한 강론을 기초로 하여 논리적 설득의 형식을 따르고 있음을 주지하여
야 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장에서 보는 바와 같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역사와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자. 오순절날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임한 성
령의 방언의 역사는 각 국에서 모인 유대인들을 놀라게 하였지만, 그들이 회
심을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모두 베드로의 길
게 이어지는 설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요엘서를 풀어 이 날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를 설명한 이후에, 이어
서 시편 16편과 110편 등을 풀어 해설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과 부활의 복음을 설교하였던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에 담겨 있는 깊고 오묘
하며 정교한 성경의 해설이 그곳에 모였던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
)이 말하는 바를 들어보도록 하
자.

– 만약 성령이 은혜의 수단과는 별개로 역사하신다면, 우리는 성령님이 ‘능
력대결’과 기도회와 고백 모임과 같은 부흥회와 같은 대중 집회에 의해 우
리를 유지시켜 주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너털웃음을 터뜨리거나 개처
럼 짖는 등의 이상한 현상에 몸을 맡김으로써 성령님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
다. 
자 이제 실제로 인간 역사 가운데 일어났던 그 오순절(사도행전 2장에 기록
된 오순절)에 대해 생각해보자 … 성령의 권능이 전 세계로부터 그곳에 모
여들었던 사람들에게 내렸으며, 베드로는 매우 긴 설교를 선포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도행전 전체에서, 우리는 선교와 전도와 확장의 면에서 교회의 위
대한 전진들은 기적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고, 선포된 말씀에 대한 응답으
로 일어났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고백하는 어떤 집단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초점
을 어느 정도 ‘능력 대결’로 바꿔치기를 하는 것은 바로 그 집단이 오순절
의 애초의 권능으로부터 그 정도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자기의 설교를 ‘진짜 흥분되는 일’에 
대한 필수적인 서두로 여기
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능력 부흥사들은 표적들과 기사들의 ‘사역 시간’ 
이전에 간단한 메시지를 그렇게 보는 것 같다 … 이는 우리가 성령님의 사
역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성경 말씀을 조명해주시는 분으로서의 고유
한 역할보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말씀과 성례전과는 별개의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찾고 있다면, 
정말로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러한 활동들
(말씀과 성례전)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제공해 준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진정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충만한 삶이 이루어질 것이
다.” (마이클 호튼, 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 258-261)

호튼이 잘 지적하고 있는 바처럼, 부흥을 위한 것이든 전도를 위한 것이든 
어떠한 집회에서 그 초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부
터 어느 정도 ‘능력 대결’로 전환하는 것은 그 집회가 오순절날의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날에 임한 성령의 권능으로부터 벗어난 것임을 주지하여
야 한다. 
성령께서는 은혜의 수단인 말
씀과 더불어 회심의 역사를 일으키신다. 다시 
말해서 설교는 결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지식의 영역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회심을 일으키는 수단인 것이다. 이미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는 전도, 곧 복음을 전하는 말씀의 전파 또는 설교라는 연약한 수단을 사용
하여 자신의 백성을 부르신다고 하였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결국 알파코스는 근본적으로 신사도개혁운동으로 이어지는 빈야드 은사주의 
운동의 맥을 따라서 은사주의적 체험에 기초한 전도 방법론이라고 판단을 내
릴 수 있다. 알파코스에 있어서 빈야드식의 성령체험은 알파코스의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요소인 것이다. 검블은 이 점을 알파코
스를 설명하는 그의 글에서 숨기지 않고 밝히고 있다. 

– 알파를 그렇게도 감격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work)이다. 대화를 전달하시고, 그룹 토론을 진척시키시고, 성경 공부
를 하게 하며 목회적 돌봄, 운영, 그리고 알파의 모든 면을 가능케 하시는 
것은 성령님의 활동이다 … 존 윔버는 사역을 ‘하나님의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
’이라고 정의하였다 … 
그러나 나는 … 좁은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즉 특별히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일어나는 사역에 관
해서 설명한다 … 성령님의 사역은 알파에 결정적이다. 그것이 없다면, 진
실로 알파코스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심으로 단순한 요구도 들으
신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놀랍고 깊은 변화가 항상 사람들의 
삶 가운데 일어난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
리며, 성령으로 충만하며, 예수님께 감격하고,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을 다
음 코스에 데리고 오는 것을 보게 된다 (알파코스 운영방법, 179-180, 202-
203)

검블이 말하는 ‘성령님의 사역’은 ‘존 윔버’가 말하는 성령님의 사역이
다. 그것은 빈야드 은사주의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빈야드 은사 체험을 
가리키는 성령님의 사역을 빼놓고 알파코스를 말할 수는 없다. 검블이 말하
듯이 성령님의 사역은 “알파를 그렇게도 감격스럽게 하는 것”이며 또한 
“알파에 결정적”이어서 “그것이 없다면, 진실로 알파
코스가 되지 못하였
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님은 성령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것이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
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예수님에 대해 말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중생케 하시며, 말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각성으로 이끄시며,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일이다. 
호튼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십자가의 신학은 완전주의, 신비주의, 영적 
엘리트주의, 공로에 의한 모든 도식들에 반대하여 서 있는 만큼, 십자가 신
학으로 이끌지 않고 신비주의에 치중하며 그것을 성령의 사역이라 일컫는 것
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비추어 볼 때 인정하기
가 어렵다. 

2. 결론

알파 코스는 본질적으로 빈야드 은사 운동을 적용한 전도의 방편이다. 이것
은 복음의 적절한 교훈보다는 소위 성령의 능력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예언, 치유, 능력기도, 영적 전쟁 등에 대해서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신학적
으로 부적절한 이해와 신앙 양태를 야기시킨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
음을 듣고 회개하며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러한 회심과 신앙은 성령님의 신비한 내적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령님은, 말씀과 성례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교훈에 순종토록 각성을 시키시며, 기도와 찬양 가운데 감사와 
회개와 순종을 통하여 성화를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기뻐
하도록 하신다. 
알파 코스가 말하는 성령의 능력 체험과 그것의 증거로 제시하는 각종의 입
신, 지식의 말씀, 예언, 치유, 영적 전투 등의 현상들이 복음의 올바른 말씀
과 상관없이 강조되며 주장이 될 경우 그 모든 것들은 성경적이며 개혁주의
적인 신학과 복음의 이해와 근본적인 충돌을 일으킨다. 즉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메시지에서 심각한 일탈을 일으킨다. 
알파코스가 비록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한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전
도의 방편일 뿐이라고 아무리 강변을 한다고 하더
라도, 알파 코스의 핵심인 
빈야드 은사주의가 필연적으로 신사도 개혁운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유의하
여야 하다. 
따라서 알파코스는 개혁주의 교단에서 결코 그대로는 용인될 수 없는 ‘신비
주의적’이며 ‘은사주의적’인 전도전략일 뿐만 아니라, 신사도 개혁운동
의 주장에서 보듯이 종국에는 교회론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므로 심히 경계해
야할 대상이다.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결코 사도 이후의 어떠한 계시적 권위를 지닌 신비적 
은사와 체험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지 않으며, 오직 성경의 교훈에 일치하
는 믿음과 은혜의 신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혁주의 목사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 개혁파 목사는 체험적 주관주
의에 호소하여 복음을 설득하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 말씀의 진리
를 강론함으로써 복음을 전도하여야 할 것이다. 체험과 감성의 세대인 오늘
날에 있어, 개혁파 목사는 성경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연구에 더
욱 더 정진을 하여야 한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학습을 통한 신학적 해석의 관
주를 만들어가면서 성경의 교
훈을 탁월하게 이해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
고 개혁주의 신앙고백문서들을 잘 풀어 가르칠만한 신학적 소양을 연마하여
야 한다.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신앙고백문서들을 강론할 때, 성령님께
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각성을 성도들과 함께 체험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이를 토대로, 기도와 찬양, 그리고 헌신과 봉사의 경건
의 총합을 이루어가야 한다. 
개혁파 신학은 은사주의자들이 비판하듯이 이성의 논리에 갇혀 있는 합리주
의의 포로가 아니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말씀과 함께 성령의 신비한 역사로 
인하여 우리의 심령을 흔들며 변화시키며 몇 날이라도 회개하며 구원의 기쁨
에 겨워 찬양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감사의 순종을 드리는 열정적 
부흥을 포괄한다. 아울러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이 세대의 문
화를 이해하기 위한 학습을 통해 불신자들의 질문과 생각을 짚어 갈 수 있어
야 한다. 
이러한 복음의 훈련이 중단되거나 결핍이 되면, 포스터모던 시대라 일컫는 
오늘날에 – 한국은 어떤 의미에서 항상 포스트모던 시대였지만 – 주관주의
에 함몰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바른
신학 위에 세워가는 목양을 올
바르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 열광주의로 나타나는 부흥을 맹목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개혁파 신학
이 아니다. 목사 개개인이 이것을 감당키 어려울 것인 만큼, 노회나 총회를 
통한 “목회자 평생교육”이 실시되도록 할 필요와, 동시에 불신자 전도를 
위한 방안을 논의키 위한 실천적 지혜와 연구를 시행할 필요가 절실하
다. <마지막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