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신학강좌 특강> “한국교회 부흥에 끼친 박윤선의신학과 신앙” 이호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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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신학강좌 특강>

“한국교회 부흥에 끼친 박윤선의신학과 신앙”

이호우 교수_한국성서대학교

한국교회 부흥과 개혁신학’이란 주제로 개최된 정암신학강좌에서 발표된 이
호우 교수의 ‘한국교회 부흥에 끼친 박윤선의 신학과 신앙’을 요약 게재한
다.<편집자주>

‘부흥’은 ‘다시 살다’라는 의미인데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력
을 주는 것으로 회심을 동반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다.

I. 들어가는 말

개신교회가 들어 온지 120년, 그 동안 한국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왔
다. 한국교회의 빠른 성장에 동력을 제공해 준 것은 짧은 역사 속에서 각각
의 시기에 일어났던 부흥운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현금의 한국교
회는 1907년에 임했던 평양 대 부흥 100주년을 맞이하여 어느 시기보다 더 
뜨겁게 부흥재현을 꿈꾸고 있다. 
“부흥”을 주제로 한 수많은 기념행사와 집회 그리고 다양한 서적과 음반들
은 부흥재현을 기대하는 한국교
회의 염원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잘 증명해주
고 있다. 하지만 부흥을 갈망하고 체험했던 초기 한국교회의 거룩한 유산은 
‘Again 1907’이라는 듣기 좋은 광고 문안으로 포장 되어 현 세대 성도들
의 감성만을 자극하고 흥분 시키고 있지만은 않은가 자성(自省)해 볼 필요
가 있다. 
정암(正巖) 박윤선(朴允善, 1905-1988) 박사는 1907년 부흥운동의 주역인 길
선주와 같은 부흥사가 아니다. 또한 김익두와 같은 인물도 아니다. 해방이
후 기도원과 교회를 통하여 활동한 대중적 전문 부흥사는 더욱이 아니다. 
박윤선은 신학교 교수요, 주경신학자요, 목회자였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활
동은 한국교회에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라는 부흥의 바
른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 한국교회에 주어진 ‘부흥재현’이라는 간절한 외침이 열매 없는 목적만 
던져주고 사라져 버리는 이벤트가 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역사적, 교회사
적 이데올로기를 겪으며 신앙적 순수함과 성서에 기초된 일관성으로 한국교
회의 참다운 성장과 부흥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박윤선의 공헌을 살펴보고
자 한다.

II. 
박윤선의 부흥 이해와 부흥 체험

1. 박윤선의 부흥 이해
박윤선은 부흥사도 부흥 이론학자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윤선의 글속에
서 부흥에 대한 정의나 그 용어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
다. 하지만 부흥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인식은 그의 글과 그의 삶 속에 매
우 명백하게 배여있다. 
부흥(revival)은 라틴어 revivere에서 파생된 것으로 “다시 살다”(to 
live again)의 의미이다. 이 ‘부흥’에 대한 어원적 의미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에스겔 37장에는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예언이 수록되어 있다. 
5절에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
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살리라”(you 
will come to life)는 구절은 “생기”(breathing)의 개념을 동반한다. 이 
생기는 생명체에 생명력을 제공한다. 생기가 없는 생명체는 죽은 것이다. 마
른 뼈에 생기를 불어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구약 성
경에 나타난 부흥운동의 동력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며 그 매체는 그
분의 말씀이다. 박윤선은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
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의 지은 죄로부터 참으로 애통하며 회개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외침을 들으시고 그들은 “다시 살리신다.” 이것
이 부흥이다. 때문에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다. 미국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주역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나 그 밖의 복음주의 학자들
은 부흥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An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즉 
성령의 역사임을 강조한다. 
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변화시키며 비 기독교인을 회심시
키는 특별한 결과를 가져온다. 박윤선도 같은 견지에서 성령의 역사로만 신
령한 생명운동 즉 부흥운동이 가능하고 교회에 절대 필요하다고 에스겔 37
장 주해를 통하여 강조한다. 
부흥은 인위적 조작이나 운동으로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부흥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으로 하나님이 이루시는 작업이다. 교회는 이러한 부흥
을 경험해야 한다. 부흥은 성경의 역사이며 기독교회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
사로 되어지는 이러한 부흥이 없으면 교회는 그 생명력을 소진하게 될 것은 
명명백백하다.
박윤선은 사도행전 6장 주석에 “초대교회의 
진흥원인”(행 6:1-15)이라는 
설교를 실었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되었다(7절). 그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 답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교회 내(內)의 불평을 잘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며, 둘째, 사도들이 집사들
을 세워 분업적으로 각기 직무를 담당시켰기 때문이고, 셋째, 지도자들이 기
도와 말씀 전하기에 전무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세 번째 요소인 기도
와 말씀 전파를 “교회 부흥의 비결”이라고 강조하였다.
요약하면, 박윤선은 부흥을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으로 간주하고 있
다. 그리고 그 부흥의 통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것을 강조하
고 있음을 본다. 교회는 그와 같은 부흥을 사모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박윤선
을 힘주어 말하였다.

2. 박윤선의 부흥 체험
개인적인 신앙의 헌신과 복음전도 나아가 교회부흥에 대한 박윤선의 열정은 
숭실전문학교 재학시절(1927-1931)부터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록 
신학수업을 정식으로 시작하기 전이었지만, 박윤선은 신학생 못지않은 열정
으로 기도와 전도운동에 그의 숭전 4년 세월을 보냈다. 
동료 6명과 
함께 새벽마다 1시간 쯤 걸어서 모란봉에 올라가 기도하였으며, 
방학 중에는 동료들과 전도단을 조직하여 지방을 순회하며 설교와 전도활동
을 하였다. 한때 만주 봉천까지 순회전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또한 숭전 4년
간 모란봉 뒷동네에 있는 가현교회를 맡아 주일마다 설교와 심방을 하였다.
길선주 목사가 숭전의 한 경건회 시간에 참석하여 설교한 적이 있었다. 설
교를 들은 후 길선주 목사에 대한 첫 인상을 “사경회(査經會) 인도자라기보
다는 부흥가였다”라고 했는데, 그의 표현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신학
을 공부하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풀어가는 설교, 성경 중심적인 설
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46년 9월부터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신학강의를 시작하였다. 해방이후 정
치와 사회가 무질서 할 즈음, 신비주의 운동과 탈선된 부흥집회 그리고 박태
선의 전도관 등의 등장은 한국 교회를 혼돈스럽게 만들었다. 이때 박윤선은 
“일반 교우들에게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그 작업
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개탄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의 6·25 동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고려신학교에서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이 비상한 현상의 현장에 있었던 심군식 목사는 그 경건회 시간을 통회와 
자복이 계속된 부흥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와 같은 부흥 현상은 1907년 1
월에 일어난 평양 대 부흥의 회개운동과 일맥하는 점이다. 1907년 부흥은 강
력한 회개와 함께 임했다. 미국 부흥운동사(史)을 살펴보더라도 제1차 대각
성운동을 비롯한 거의 모든 부흥운동 기간에 죄의 고백과 즉각적인 회개가 
반드시 일어났다. 회개와 영적 각성은 바로 1907년 부흥운동의 직접적 현상
이었다. 
1950년 봄에 일어난 이 기도운동은 고려신학교 학생들 사이에 회개와 각성
을 촉진하는 부흥현상을 낳았고, 박윤선 스스로 그 부흥현상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 회개의 기도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고려
고등성경학교(부산 부민동 소재)를 비롯하여 고려측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6·25 동란이후 박윤선은 또 다시 부흥운동을 주도하고 그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부산에는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9·
28 서울 수복이 있기 전에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몇 분들과 의논을 걸쳐 초
량교회에서 소위 “전국 피난교역자 부흥회”를 일주일간 개최하기로 결정하
였다. “그때 부흥회의 목적은 교역자 자신들이 자아반성(自我反省)에 따른 
회개였다.” 
한상동, 박형룡, 김치선 그리고 박윤선 등이 이 부흥회의 주강사였다. 매일 
새벽기도회와 낮 성경공부 그리고 저녁집회를 돌아가며 인도하였다. 매 시
간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는 가운데 참석한 교역자들 거의 대부분이 
크게 통회하며 자복하는 회개를 하기 시작하였다. 다시금 회개운동이 일어
난 것이다. 
특히 부흥집회 셋째 날 새벽설교를 맡은 박윤선은 한부선 선교사에게 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상세히 증거하면서 신사참배의 죄를 그 자신부터 여러 
교역자 앞에서 공개적으로 회개하였다. 그러자 청중석의 목회자들도 한 사람
씩 한 사람씩 회개의 기도가 연이어졌다. 
그 집회는 청중들의 요구로 한 주간 더 계속되었다. 회개운동의 부흥 현상
은 그것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다. 곧이어 낙동강 유역의 울산과 온산에서도 
부흥집회가 열렸고, 역시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박윤선은 한상동과 
이학인 두 
목사와 함께 제주도로 건너가 서부교회당에서 피난교역자들을 위
한 집회를 한 주간 개최하였다. 이 집회에서도 동일한 회개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다. 
그 이후 고려신학교 교수 재직시절 내내, 박윤선은 주중에는 신학교 강의를 
하였고, 주말이면 경남 각지의 지방교회를 순회하며 부흥집회를 인도하였
다. 그때마다 은혜와 감동적인 설교로 많은 사람을 감화시켰다.

III. 부흥을 위해 넘어야할 한국교회의 개혁 과제

1986년 11월의 ‘신학정론’4권 2호와 1987년 5월의 5권 1호 그리고 1988
년 7월의 6권 1호에 “무엇을 개혁해야하나”라는 제하의 글을 세 번에 걸
쳐 집필하였다. 이 글은 한국 교회에 남긴 그의 마지막 유언이라해도 지나치
지 않을 것이다. 그 내용은 “현하 한국교회가 개혁해야할 과제”라는 제목
으로 묶여져 그의 자서전 ‘성경과 나의 생애’에 실려 있다. 
이 글에서 박윤선은 물량주의 폐단, 사제주의의 부당성, 사역상 평등의 원
리 상실, 교회 행정의 부조리, 교회보다 교회의 조직을 과대평가하는 오착, 
교회관의 문제점, 신자들의 진리지식 문제 등 7대 개혁 과제를 제시하였다. 
그의 글에 널리 
지적되는 또 다른 개혁의 과제는 교권주의이다. 이 모든 문
제들은 한국 교회가 바르게 부흥하고 성장하는데 큰 걸림돌이라고 그는 생각
했다. 특히, 이들 중에서 물량주의와 교권주의 문제는 그가 꼽는 대표적인 
개혁의 과제들이다.
첫째, “물량주의는 성경적이 아니다”고 박윤선은 논박했다. 한국 기독교
는 서구 기독교 지도자들이 볼 때 놀랄만한 두 가지 일이 있다. 첫 번째는 
한국교회의 눈부신 교회 성장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유래 없
는 교회성장을 경험하였다. 두 번째는 인구의 20퍼센트에 달하는 즉 천만에 
가까운 성도를 자랑하는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
고 있는 것에 대해 놀란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 지상주의에 치우
쳐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외향적 성장이 곧 부흥이요 부
흥은 곧 교회의 외향적 성장이다. 결국 부흥을 “물량적” 척도로 측정하려
고 하였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성도들에게 성숙과 성화를 강조하지 않는 병
폐현상을 낳고 있다.
수적 성장과 외형적 성장에 편향된 부흥 개념은 한국교회를 결과주의 또는 
번영주의로 치닫게 하고 있다
. 이것이 박윤선이 지적하는 한국 교회가 풀어
야할 중대한 과제이다. 또한 그는 학문과 소명 그리고 인격 등 기본적인 소
양에 있어서 충분한 자격과 훈련을 거치지 않은 목회자가 다량으로 배출되
는 것도 물량주의의 한 폐단이라고 했다.
박윤선은 교회의 참된 표지로 하나님 말씀의 선포, 성례의 바른 시행, 권징
의 바른 집행 등 세 가지 요소를 꼽았다. 그중에서도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대하여 이렇게 강조하였다: “성경과 부합해야 참된 교회이다. 성경의 권위
가 교회의 권위보다 앞서며 또한 그것이 교회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선포와 그 권위에 대한 인정은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
적인 요소인 것이다.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양육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
신자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살리며 그리고 신자의 영혼에는 영적 각성(부
흥)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된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성결”의 삶을 각성시킨다. “성결의 지혜를 받은 신자
는 영적 허욕을 버리게 되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 제일주의로 행하며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박윤선은 강조한다.
둘째, 교권주의 또한 교회부흥을 위해 넘어야 할 개혁의 과제임을 박윤선은 
그의 글 도처에서 밝히고 있다.
박윤선은 그의 인생에 큰 충격을 주었던 교회와의 갈등, 특히 교권과의 갈등
을 몇 차례 경험하였다. 예를 들어 1946년부터 14여 년간 목회자와 신학자
로 몸담았던 장로교 고려파를 떠나는 사건이 1960년에 일어났다. 1957년, 교
회 건물 소유권 논쟁을 세상 법정을 통해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송상석 목사
와 그와 반대 입장을 가진 박윤선 목사간의 갈등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
해졌다. 그 와중에 “교권주의와 결탁되면서 고려파 안에 반(反) 박윤선 정
서가 조용히 확산되었다.” 
더욱이 1960년 7월 하순에 일어난 소위 “스푸너(Arthur B. Spooner) 선교
사 사건”으로 인해 더욱 갈등은 표면화되었다. 스푸너 선교사가 주일날 미
국으로 출국하는 바람에 그를 환송하며 선상에서 간략히 예배를 드리게 되었
는데, 주일성수의 문제가 붉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이 문제가 확대되면서 
박윤선은 고려파와 결별하게 된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 주일성수의 문제였
으나, 실제
적으로는 당시 고려파의 실권을 쥐고 있던 목회자들 측과 겪어야 
했던 교권의 문제가 더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1980년 11월, 박윤선은 1963년부터 17년간 교수와 신학자 그리고 목회자로 
활동하였던 장로교 합동측과 총회신학교와 결별하고 합동신학교 설립에 합류
하였다. 박윤선과 그의 동료 교수들은 합신 설립배경을 “합동의 교권주의
로 인해 총신에서 온전한 신학교육을 실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떠
나야 했다고 말한다.” 신학적인 문제로 총신을 떠난 것이 아니라 교권문제
로 떠났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박윤선이 겪었던 1960년 고려신학교와의 결별 그리고 1980년 총회
신학교와의 결별 이 두 가지 사건은 분명 교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교권주
의 또는 교회 정치와의 문제 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로서의 심각한 고민의 결
과였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박윤선을 “한국교회에 뿌리 내린 교권주의에 
맞선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대변자로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이 사건들은 박
윤선으로 하여금 현실 교회의 정치 현실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도록 만
들었고, 한국교회를 위한 개혁주의적 교회론을 정립하는데 자극을 주었다. 

“정암의 경건은 말씀과 기도로 부터 나왔다”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이 땅에 정착시키려는 개혁주의 신학자 박윤선의 생
애는 바로 경건을 추구하는 삶이었다.

IV. 한국교회의 바른 부흥을 위한 박윤선의 업적

한국교회의 개혁, 나아가 부흥을 염원했던 박윤선의 초심은 1931년으로 거슬
러 올라간다. 당시 평양신학교 재학중이던 어느 날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한국 교회를 위해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박윤선은 장고하기 시작
했다. 그 명제를 늘 가슴에 담고 그는 일생 한국교회를 위해 살았고, 한국교
회를 섬겼고, 한국교회를 목양했다. 그 결과 그의 신학은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이 되었다. 

1. 신학교육
박윤선의 생애 전체는 신학생을 교육하는 교수로서의 삶이었다. 그가 신학교
육에 첫발은 내딛은 것은 1936년 8월이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그 해 5월에 귀국한 박윤선은 그의 모교 평양신학교의 원어
강사(1936.8-1938.7)로 신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매사에 진실하고 열정적
인 성격을 지닌 그가 성경원어를 가르치는데 정열을 쏟았음에 틀림없었을 것

다. 
1941년 4월부터 1943년 7월까지 그는 만주 봉천신학원의 교수로 초빙받아 그
곳에서 사역을 하였다. 해방이후 1946년 6월 고려신학교 설립에 가담하면서 
그해 9월에 개강한 이 신학교의 교수로서 1960년 10월까지 조직신학과 변증
학, 주석과 원어 등 수다한 과목들을 강의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박윤선은 총회신학교에서 1963년 3월부터 1980년 11월까지, 
1974년 11월 은퇴이후 몇 년의 기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간을 가르치는 일
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1980년 11월부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1988
년 6월 30일까지 그가 설립한 합동신학교의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혼신
을 다 하였다.
신학교육을 위해 그가 가르쳤던 학교들은 평양신학교, 만주 봉천신학교, 고
려신학교, 총회신학교, 그리고 합동신학교이다. 1936년에 시작하여 1988년
에 마쳤으니 햇수로 52년에 달하는 것이며, 해방이후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신학교육 기간만 따져도 무려 42년(1946-1988)에 달한다. 그 기간 동
안 강사, 교수, 교장, 원장 등 다양한 직무를 감당하였다. 
42년간 박윤선은 고신과 총신 그리고 합신에서의 신학교육을 통하여 한국교

n회에 개혁주의의 진수를 심어주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나의 교수 생활에 
있어서 언제나 불타는 가슴으로 학생들에게 주고자 한 것은 칼빈주의 신학이
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 신학이야말로 성경을 그대로 믿는 말씀의 신학이
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의 단 맛을 체험했으므로 후학
들에게 나의 깨달은바 성경 진리를 전해 줌에 있어서 나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주목할 점은 그의 신학교육이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단순한 지식 전달
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강의는 언제나 어디서나 매우 열정적이었
다. 아마도 박윤선의 몸에 배여있는 뜨거운 영성 때문일 것이다.
박윤선의 강의는 “매 시간 꼭 부흥회와 같았다. 눈물로써 기도하고 숨은 
죄악들을 고백하였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 사랑과 존
경이 오갔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1950년에 있었던 고려신학교 부흥운동 
이야기에서 살펴본바 있다. 총회신학교나 합동신학교에서도 그러한 현상은 
마찬가지로 계속되었다. 박윤선의 “감동적인 설교, 지칠 줄 모르는 기도, 
부지런한 농부 같은 근면함, 현장감 있는 신학강의는 학생
들을 매료시키기
에 충분했다.”
42년간의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박윤선의 뛰어난 신학 강의는 학생들을 사로
잡았고, 그의 경건하고 뜨거운 영성은 학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근
삼 목사는 박윤선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이 그의 가르침을 회상하였
다: “그 열정적 외침은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고 눈을 밝혀 주었습니
다. … 신학교 교단에서 교회 강단에서 증거하시던 외침은 언제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 외침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공감을 일깨워주고 주님을 향
한 사랑의 불길을 일구어주셨던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의 밑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그분의 신학과 영성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숫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틀림없이 계산하기 힘들정도로 그 숫자
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의 대부분이 목회자
가 되어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윤선의 신학교육은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전달하
는 통로였으며, 나아가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불길”
로 헌신할 수 있는 부흥의 일군을 양성하는 일에 크게 공
헌하였다.

2. 성경 주석 집필
박윤선 스스로 “평생 중요 사업은 신학교육과 성경 주석 사업”이라고 증언
한 대로 성경 주석 집필은 그의 필생의 과업이었다. 박윤선은 개혁주의의 근
본원리를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라고 정의했다. 박윤선에게 있어
서 “칼빈주의(개혁주의)의 규준(規準)은 성경이다. 칼빈주의는 성경에서 시
작하고 성경으로 진행하고 성경으로 마감한다. 칼빈주의는 성경이 가는데까
지 가고 성경이 멎는 데서 멎는다.” 
한국교회는 성경에 의해서 태동되었고 성경을 배우며 성경과 함께 성장하였
다. 1907년 대부흥도 성령의 특별한 임재였던 동시에 성경중심적 신앙운동
의 결과였다. 이 대부흥운동의 주역 블레어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한국의 부
흥운동과 성경의 관계를 기록하였다: “한국교회의 빠른 성장과 50년 이상 
계속되는 부흥에 대한 특별한 설명을 묻는다면 저는 망설임없이 성경공부반
(the Bible study classes) 활동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공부반은 초기 한국교회에 있었던 사경회를 말하는 것이
다. 사경회가 1907년 대 부흥운동의 실질적인 산실이었으며 부흥운동의 수단
r
이었음은 매우 자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사경회를 통하여 한국 교회는 하나
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신앙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그러한 한국교회를 섬겼던 박윤선 신학의 원천 역시 바로 성경 그 자체였
다. 성경의 무오성과 성경의 유일한 권위에 대한 확신의 그의 신학의 출발점
이었다. 따라서 주경신학자 박윤선에게 있어서 개혁주의 성경관과 해석관이 
철저히 배여있는 성경 주석 사업을 그의 필생의 사명으로 알았고, 그 일을 
어떤 다른 일보다 기쁨으로 감당했다.
필생의 사명으로 여긴 주석집필 작업은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고린도후서’ 출간을 시작으로 1979년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를 출
간함으로써 40년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신구약 66권 주석을 완성하였다. 
박윤선의 성경주석은 한국 목회자들 사이에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해 주었
으며, 따라서 그 독자들에게 끼친 대중적 영향력은 매우 지대한 것이다. 박
윤선의 성경주석이 대중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그의 성경 해석관
과 성경관의 대중화를 의미한다.
첫째, 박윤선의 성경주석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야함을 한국교회에 일깨
워 주었다. 
박윤선은 이 주석집필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주석 저술의 동기는, 나 자신이 먼저 성경을 바로 깨닫고 깊이 안후
에 이 성경을 올바로 증거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성경대로 믿음을 
가지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다.”

박윤선은 한국교회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
며 그의 주석을 집필한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고 해석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되어지지만, 인간편에서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성경을 바
로 깨닫고 바로 해석하는 노력이다. 즉 성경해석에 필요한 준비공부를 확실
히 해야 하며, 바른 기도생활과 성경대로의 진실한 삶과 특히, 성령님의 감
화력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둘째, 박윤선의 성경주석은 개혁주의 성경관을 한국교회에 가르쳐 주었다. 
그는 평생 “오직 성경만이 정확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인 줄 확신
하고 성경을 바로 알고 그대로 전하는 것이 사도적 전도하고 믿으며, 지금까
지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한 평생 성경 무오의 진리를 믿고 
성경을 해석하는 중 때로는 자유주의
자들의 잘못된 주장을 비판하여 왔
다.” 이와 같은 박윤선의 성경관은 그의 성경주석에 그대로 녹아 있다. 때
문에 박윤선의 주석이 “자유주의의 성경적 입장을 막아주는 커다란 울타리
를 치는데 성공”했으며,”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입장을 말해줌으로써 더
욱 더 개혁신앙을 자극”시켜 주었다는 박영희의 평가는 매우 적절하다고 사
료된다.
3. 강단 설교
박윤선은 신학자일 뿐만 아니라 설교자였다는 것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그
에게 있어서 신학교수 사역과 설교사역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신복윤의 말
처럼 “그는 기도 없이 못 산 것처럼, 설교 없는 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다”
고 할 수 있다. 
첫째, 그는 강단의 설교자였다. 박윤선은 신학자이면서도 평생 설교자로서 
목회의 길을 걸었다. 동산교회(1961-1964), 부산 성산교회(1965-1967) 그리
고 한성교회(1968-1973) 등의 강단을 설교자로 꾸준히 지켰으며, 그 외의 시
기에도 그는 주일마다 교회강단에서 말씀 전하는 일을 거의 쉬지 않았다. 박
윤선 목사의 목회 활동은 일반적인 목회이기보다는 설교로 섬기는 목회라 
할 수 있다. 목회자를 키우는 신학교 교수는 반드시 목
회경험이 있어야 한다
고 박윤선은 생각했다. 때문에 박윤선은 교수 사역을 하는 동안에도 주일이
면 거의 매주일 설교사역으로 목회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둘째, 박윤선은 설교 집필자였다. 수많은 설교를 집필하고 출간함으로써 한
국 교회 강단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고려신학교 교지 ‘파수군’에 40편의 
설교, 성경주석에 1,053편의 설교, 그리고 3개의 설교집 ‘영생의 원천’
(1970), ‘응답되는 기도’(1974), ‘주님을 따르자’(1975)에 240편의 설교
가 수록되어있다. 그 외에도 171편의 설교가 녹음 테이프로 보존되어 있다. 
이 자료들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그의 설교는 총 1,512편에 달한다. 
그가 집필한 모든 설교들은 박윤선 자신의 신학적 확신과 신앙적 체험의 산
물이었다. 이 설교들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물론이고 평신도들에게도 많
은 도움을 주었다.
셋째, 박윤선은 설교가 주는 영적 각성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었다. 1970년 
간행된 자신의 첫 설교집 ‘영생의 원천’ 머리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
씀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깨닫는 순간에 생명의 약동을 
느낀다. 그 생명의 움직임을 말할 
때에 설교가 된다. 설교는 강연도 아니
고, 변론도 아니고, 영적 생명의 움직임이다. 이와 같은 역사는, 간절한 기
도와 성경에 대한 경건한 연구와 특별히 그 말씀 순종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
물로 임하는 성령의 열매이다.”
요약하면 강단과 교단의 설교자, 설교집필자, 영혼을 일깨우는 그의 설교 
등과 같은 박윤선에 대한 수식어들은 한국교회의 강단을 풍요롭게 하는 부흥
의 원천들이었으며, 한국교회 성도들을 일깨우는 감화력이었다.

4. 기도의 삶
박윤선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숭실전문학교 재학 시절부터 그는 몇몇 친구들
과 기도모임을 구성하여 매일 새벽 모란봉에 올라가서 기도했다. 그때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동료들 사이에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박윤선은 고신에서 회개 기도운동으로 신학생들을 일깨웠고, 총신 시절에는 
학교 뒷동산을 기도의 골방을 여기며 기도의 본을 보였다. 합신에서 봉직할 
때도 기도를 강조했고, 기도를 실천했다. 학생들에게 “죽도록 기도하라”
고 설교했고, “기도하다가 죽었다는 말을 들어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의 무릎은 신학교육과 성경주석과 설교를 위해 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
는 기도의 무릎이었다. 그리고 “기도”는 그의 주석과 설교에서 가장 많이 
다룬 주제였다. 그는 평생 기도를 좋아했고 기도를 실천하며 살았다.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기도의 삶이었다. 
특히 신학생들 또는 목회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며 기도의 삶을 강조하
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기도없이 신학운동은 불가
능하다는 것이다. 신학운동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참된 기도없이 “경건의 능력”을 소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연구
에는 반드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박윤선의 논지이다.
기도는 부흥운동의 중요한 요인들 중에 하나이다. 말씀과 부흥의 관계처럼 
기도와 부흥은 매우 밀접한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듯, 
120명 성도들은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임재와 부흥을 경험하였다. 기도를 통
해서 영성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기도는 초기 한국교회
의 대부흥(1903-1907)의 가장 강력한 동인들 중에 하나였다.
박윤선은 총신의 졸업식 훈사를 통하여 장차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목회자 후
보생들에게 다시 한번 기도의 사람이 될 것
을 강조하였다. 신학생과 목회자
들이 기도의 모범이 되고 기도의 능력을 터득하게 될 때, 비로소 교회 부흥
의 파수군 그리고 그리스도 복음의 전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도없
이는 부흥도 없고 기도없이는 경건의 능력도 없고 그리고 기도없는 성경연구
와 복음전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
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전 1987년 ‘신학정론’에 발표한 글에서 이 부분
을 명료하게 밝혔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 그들은 성경 연구도 여기 
‘하나님과 교통함이라’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연구는 심령(heart)보다 이
지(reason)가 주체로 역할하기 쉽다. 따라서 그것은 전인격이 관계되는 경건
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성경연구는 절대로 필요하지만 기도 없이는 완전치 
못하다.”
5. 경건의 삶
합신의 설립 정신은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다. “바른 생
활”(벧후 3:10-13)대한 그의 글에서 박윤선은 경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경건”으로 번역된 헬라어 유세베이아(ε?σ?βεια)는 ‘좋게 놀란다’는 어
원적 의미를 가진다. 신자는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 앞
에서”(Coram Deo) 살아야 된다(고전 10:31). 그뿐 아니라 그는 특별한 자
리, 곧 정신차려 성경을 읽음과 깨어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된다. 
이 두 가지는 경건 생활의 원천이다. 그는 이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
나님을 만남으로 좋은 놀람을 체험하게 된다.

칼빈을 경건의 신학자 그리고 그의 신학을 경건의 신학(theologia pietatis)
라고 부른다.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이 땅에 정착시키려는 개혁주의 신학
자 박윤선의 생애는 바로 경건을 추구하는 삶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의 
원천은 말씀과 기도였다. 경건은 박윤선의 삶 자체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
육의 핵심이기도 했다. 합신의 설립과정에서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박윤선
의 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학교육 뿐만 아니라 교회 역시 경건의 훈련장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경건을 삶의 방향으로 삼았던 박윤선의 전 생애는 학문과 신앙이 혼연일체
를 이룬 삶이었고, 말씀과 기도가 병행된 삶이었다. 무엇보다는 말씀과 기도
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그의 가르침은 그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이었음에 틀림
없다.

V. 맺는 말

1907년에 일어난 대 부흥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교회는 총체적으로 부흥
을 크게 외치며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 이 기념비적인 해에 한국의 대표적
인 개혁주의 주경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박윤선 박사의 공헌들 중에서 
한국교회 부흥에 영향을 준 그의 업적들을 정리하는 작업은 매우 뜻 깊은 일
이라고 사료된다. 
“부흥”이란 단어보다는 “개혁”이란 단어를 더 좋아했던 그는 필생 한국
교회의 개혁을 염원하며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말씀
과 기도에 많은 시간을 보내며 남을 비판하는 일은 멀리하고 자기 개혁과 자
기비판을 우선적으로 항상 강조하였다. 그의 부흥의지 또는 개혁의지는 “바
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라는 슬로건 안에 명백히 담겨져 있다. 
박윤선은 “말씀과 같이 사시고 말씀과 같이 동행하시고 말씀을 먹고 마시다
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노진현 목사는 회고했다. 그러한 박윤선의 
삶이나 학문은 개인적 경건을 이루는데 그 가치가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삶과 학문은 바로 한국교회를 위한 삶이며 신학이었다. 말씀과 기도로 중단
없이 한국 교회를 
섬겼으며 일깨웠다. 그는 제2의 길선주도 아니고 제2의 김
익두도 분명 아니다. 하지만 박윤선은 신학자요, 성경주석가요, 설교자요, 
기도자요, 경건한 신자로서 한국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이다. 
현재의 한국교회가 꿈꾸는 부흥재현은 분명 양적 팽창만은 아니다. 인본주의
와 세속주의 그리고 다원주의가 편만해져가는 이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부흥
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단련된 “바른 신학, 바른 교
회, 바른 생활”의 회복이다. 바로 그 정점에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사셨
던 박윤선 박사가 우뚝 서있음을 한국교회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