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정암신학강좌<1>_목회적 관점에서 본 정암 …_정성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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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정암신학강좌<1>

<편집자주> 11월 7일에 있었던 제18회 정암 신학강좌는 정암의 설교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을 통해 우리 시대의 설교에 대한 반성과 대안을 제시했다. 이
에 목회학적, 교회사적, 설교학적 이해와 그 의미를 함께 나누기 위해 강의 
내용을 요약해 특집을 마련했다.

목회적 관점에서 본 정암 박윤선의 설교

정성구 목사_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들어가는 말

필자는 10년전 정암 신학 강좌에 초대되어 ▩ 박윤선 목사의 설교 ▩라는 주
제로 발표한 바 있다. 그간도 정암 박윤선 목사에 대해서 여러 모양으로 연
구되어진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박윤선 목사님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어느 교단 어
느 교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개혁주의 신앙을 따르는 목회자들의 사
표이자 칼빈주의 신학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런데 역사적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서 완전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는 없다고 본다. 특히 박윤선 목사님의 경
우 성
경 주석 전집을 완간하고 몇 권의 설교집을 내긴 했어도 본인 자신에 
대한 회고록은 없고 다만 신앙고백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로서의 박윤선 목사를 연구하려고 할 때 자연스럽게 자료에 
의하기보다는 직접 박목사님과 더불어 사역을 해본 사람들의 증언과 경험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필자는 어느 정도 이 글
의 주제에 대해서 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30여 년 간 박 목사님의 가까이에서 있던 사람으로 객관성을 잃어버릴 염려
가 없지 않으나, 자료의 빈곤을 감안하면서 신학자와 성경 주석가로서 뿐만 
아니라 목회자로서의 박윤선 목사님의 면모를 살피고자 한다.

1. 박윤선 목사의 목회적 관심

박윤선 목사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증경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설교 중에 말
하기를 “루터가 성경번역의 왕이라면 칼빈은 성경주석의 왕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렇다면 박윤선 목사님은 우리나라에 성경주석의 왕이라고 할 수 있
다.”고 했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의 주석은 언제나 한국교회의 교역자들의 
강단을 의식한 것이었고 주석에서 깨달은 진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외
쳤다. 
박윤선 목사님의 관심은 언제나 목회의 일선 목사를 염두에 두고 주석을 썼
다. 혹자는 평하기를 박윤선 목사의 주석은 학문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사람
이 있으나, 박 목사님의 관심은 주석을 쓸 때 번잡한 이론을 생략하고 목회
의 유익을 주는 것이 무엇이며 신령한 은혜를 받는데 좀더 실제적인 것이 무
엇이냐에 초점이 맞추어 있었다. 그는 주석을 쓰면서 늘 가슴이 뜨거워졌
고, 뜨거운 가슴으로 깨달은 진리를 생명력 있게 증거하고 싶었던 것이 곧 
그의 목회의 관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윤선 목사님은 주석 쓰는 일과 교수 사역이 평생의 업이었지만 앞서 말
한 대로 그는 목회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다. 박 목사님은 1940년 3월 만주 
한인 예수교 장로회 신경 노회에서 목사로 장립 받는다. 그 때부터 만주 봉
천의 오가황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가 된다. 해방 후인 1946년 6월부터는 
경남 진해 경화동 교회를 시무하면서 신학 강좌를 개설한다. 
1960년 고려 신학교의 교장직에서 물러나와 부산 금정산에서 기도하던 중 
1961년 1월에 서울 동산교회로 부름을 받는다. 동산교회를 개척 시무해서 
큰 교회로 발전시키고 1968
년에는 다시 서울 상도동에 한성교회를 개척하고 
담임목사로 5년 동안 시무했다. 
박윤선 목사는 신학자로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에 평생을 보냈지만 그 자
신이 목회에 대한 불타는 심정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목회 일을 감당함으로
써 그의 신학은 냉랭한 이론이 아니고 뜨겁고 확신에 찬 기쁨의 신학이 되
게 했으며, 그것을 또한 학생들에게 힘있게 가르친 것이다. 

2. 박윤선 목사의 목회의 실제

박윤선 목사가 앞서 말한 대로 목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있기는 했으나 실
제로 그가 목회를 해 본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선 그는 1940년 4월에서 
이듬해인 1941년 4월까지 1년 동안 오가황 교회를 시무했다. 그리고는 그
는 1946년 6월에서 9월까지 경남 진해 경화동 교회를 3개월 목회했다. 
그나마도 그 3개월 동안 그 교회에서 신학강좌를 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려신
학교의 시작이었으며 그 강좌를 마치고 바로 고려신학교 교장 서리를 지내다
가1948년 4월부터 1960년 10월까지 12년 동안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봉
사했다. 그러므로 실제로 경화동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후 한상동 목사님의 그룹과의 
갈등으로 빚어진 이른바 박윤선 목사의 주일
날 선교사 환송예배를 빌미로 고려신학교에서 물러나서 부산 금정산에서 기
도하던 중 서울 동산교회의 초대목사로 부름을 받게 된다. 즉 1961년 2월에
서 1964년 4월까지 3년 2개월 동안의 목회가 일생동안 처음 맛보는 것이었
을 것이다. 
박윤선 목사는 1965년 3월부터 1967년 2월까지 부산의 총신분교장과 교수 
일을 보면서 부산 성산교회를 돌보았다고 하나 목회를 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다가 1968년에서 1973년까지 다시 총신 신대원 교수 일을 하면서 서울 
상도동 한성교회를 개척했다. 

한성교회 설립에는 필자도 군목의 신분으로서 목사님을 도와 가끔 저녁 설교
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한성교회도 그냥 말씀을 증거 하는 설교자의 역할
을 했을 뿐이고 엄밀한 의미의 목회를 했다고 볼 수 없다. 박윤선 목사님은 
어디를 가든지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말씀을 듣기를 원함으로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박윤선 목사가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주석을 하면서 그
가 깨달은 진리를 증거 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느 목회자처럼 심방을 하거
나 교회행정을 하거
나 기타 목회적 돌봄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가 목회를 했던 기간은 요즘 식 개념으로는 겸임교수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윤선 목사는 기도의 사람에다 영혼 사랑에 대한 타는 
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박윤선 목사는 반세기를 목사로 있었지만 그는 
교수요 신학자요 주석가로서 일했고 목회자로서는 극히 적은 부분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동산교회에서의 3년 간 목회, 즉 당회장
으로서의 목회가 그래도 목회다운 목회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신학교에서 교수하는 일이 없이 목회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3. 牧會者로서의 朴允善 牧師
-동산 교회 담임목사 시절을 중심으로-

동산교회는 박윤선 목사를 초대 담임 목사로 모시고 개척하게 된 것을 늘 자
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성도들은 한국의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새 문안
교회에서 나왔지만 순수한 복음적 신앙, 정통신앙,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
고 신앙생활을 한다는데 크나큰 자부심을 가졌다. 그래서 박 목사님의 설교 
시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노트에 설
교를 받아쓰고 정리하는 광경
은 다른 교회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장면이었다. 
또 1961년 2월 5일 박윤선 목사님을 모신 동산 교회는 남자 7인, 여자 17인 
위원회로 교회의 제반 업무를 수행케 했다. 당시 교회의 모든 일 처리는 법
보다 은혜가 먼저였고 모든 의견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빈손으로 시작
한 교회이므로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산 교회는 초대교회에 가장 가까운 교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박윤선 목사라는 큰 산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의 말씀의 권위 앞에 누
가 감히 아니오 할 자가 없었다.

1) 박윤선 목사의 목회설교
박윤선 목사가 동산교회를 목회 할 때, 주일 오전, 주일 밤, 수요일 밤은 
어김없이 박목사님의 설교였다. 손님 목사에게 설교를 부탁한 일도 없거니
와 부교역자였던 유영빈, 고응보 목사가 설교한 일도 없었다. 교회마다 그 
흔한 헌신예배나 특별 예배도 없었다. 예배는 반드시 자신이 인도하고 설교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는 박 목사님이 교회를 말씀중심 곧 설교중심의 교회로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진리에 굶주렸던 
성도들이 단 한 시간도 빠짐없
이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다른 분은 감히 설교를 
할 수도 없고 설교 할 기회가 없었다. 
사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일반 교회의 목회자의 설교와는 달랐다. 당시 
박 복사는 일반 목회자들의 방법대로 성도들의 필요를 감안하거나, 교회의 
행사나 교회의 방향에 맞추거나 또한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서 성경본문을 택하거나 설교 제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박윤선 목사는 동산교회를 목회하는 중에도 심방이나 교회행정은 온전히 부
교역자인 고응보 목사나 유영빈 목사에게 맡긴 채 하루 종일 기도와 말씀연
구에 주력했다. 즉 주석 쓰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그러므로 박윤선 목사의 
목회가 일반 목회자들의 목회와 비슷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
다. 

사실 박윤선 목사는 말이 목회이지 일반적 의미의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대로 쏟아 붓는 형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날마다 부흥되었으며 뜻 있는 성도들이 모이기 시
작했다. 사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단순히 설교학적으로는 평가가 되지 

는다. 
박 목사의 설교는 매우 딱딱하고 절제된 표현에다가 문학적이지도 않고 대중
적이지도 않다. 유머도 별로 없고 그저 성경진리를 깨닫는 대로 증거 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기도 하고 잔기침을 많이 하는 데
다 목소리는 톤을 높일 때 쇠소리가 나서 부드럽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었고 한편의 설교에 생명을 걸었다. 

박윤선 목사의 설교에는 어떤 틀이 없었다. 가령 위에서 말한 <신비주의>
란 설교에서 “이제는 결론을 맺으려 한다.”고 말해 놓고 거의 10분 이상
을 설교를 계속 했다. 이런 일들은 그의 주일 설교나 밤 설교에도 예외가 아
니었다. 그는 성령께서 은혜주시는 데로 또 성경진리가 깨달아지는 대로 사
력을 다해 설교하기 때문에 반복이 많았고 어떤 틀에나 시간에 매이지를 않
았다. 
가령 박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하나있다. 즉 설교란 마치 
큰 나무에 대못을 박듯이 처음에는 가볍게 두들기다가 중간쯤 못이 들어갔
다 싶으면 사정없이 그 못이 나무에 박히도록 힘껏 내리쳐야 한다고 했다. 
과연 그의 이론처럼 처음에는 조용조용히 말씀하
다가 어느 정도 진리가 들어
갔다 싶으면 마치 굵은 대 못을 박듯이 사정없이 망치로 두들겨 때리는 식이
었다. 
또 다른 박 목사님의 설교이해는 설교 준비 없이 강단에 서는 것은 마치 소
를 유기 그릇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즉 준비 없는 설교는 청중들
에게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심령들을 헝클어 놓는 것 밖에 
안 된다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는 신학자이면서 항상 설교를 생명처럼 귀히 
여겼다. 그러면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관을 좀 더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박윤선 목사는 그의 설교관은 곧 그의 성경관에 나오고 그것은 바로 칼빈주
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트리니티 대학교(Trinity Evangelical 
University)의 랄센(David L. Larsen)교수는 박윤선 목사의 설교관을 그대
로 인용하면서 “설교란 강의도 아니고 변증적인 말도 아니다. 설교란 영적 
삶에서 생산된다.”고 했다. 

흔히들 박윤선 목사의 설교는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들어야 제 맛이 나는 설
교라고 한다.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없는 사람들은 그의 설교가 아주 힘들
어 보이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대중적인 기교도 없고 유머
도 없
고 전형적인 평안도 악센트에다 음성도 짓눌려 나오는 쇳소리 같았었고 말
을 반복하는 유형이었으나 진리에 대한 열정 하나가 청중들을 사로잡을 수
가 있었다. 
박윤선 목사의 고백적 설교론은 칼빈주의적인 구속사적 설교를 압축해 놓은 
듯하다. 이와 같은 구속사적 설교 (Redemptive-historical preching)의 방법
은 본래 사도들의 설교 방법이 있으나 1930년대 화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부활되었다. 박윤선 목사는 구속사적 설교를 하면서도 오늘의 상황(Context)
에도 무심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주석적, 구속사적으로 연구
하면서 기도로 뜨거워진 설교였기에 그의 감화력은 대단했다. 

우리는 위에서 박윤선 목사는 칼빈주의적인 설교 또는 구속사적 설교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는 몇 가지 구체적인 특징이 있다고 본다. 즉, 그
의 설교는 일찍이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설교 방식과 다르지 않다. 
① 그의 설교에는 늘 하나님 중심 또는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드러내는 것이다. 
② 그의 설교에는 오직 성경(Sola Soriptus)만을 힘 있게 주장하고 
③ 그의 설교에는 오직 은혜(Sola Grati
a)의 사상이 보이며 
④ 그의 설교에는 오직 신앙(Sola Fide)을 엿볼 수 있다.

2) 朴允善 牧師의 牧會活動

앞서 말했지만 박윤선 목사의 목회 활동은 오직 설교뿐이었다고 할 만하
다. 그것마저도 그의 성경 주석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할 만큼 그의 주석 사
역과 설교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목회 활동 전반에 걸쳐서 모
든 것을 부목들과 당회원들에게 맡긴 체 오직 말씀 증거 하는 것에만 주력했
다. 박 목사님의 뜻도 그러하지만 교인들의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새문안 교회에서는 여러 해 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전장이 되었고 정치
적 이야기로 매워진 것에 대한 염증이 일어났으며, 갈라져 나온 성도들은 순
정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듣기만을 소원했기에 목회자인 박 목사님과 성
도들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그래서 박목사는 설교이외의 방면에서는 목회자
다운 역할을 해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날의 목회의 개념은 설교뿐만 아니라 상담, 교육, 행정, 심방,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서 통합적 목회의 개념이 주된 관심이다. 그런데 박 목사님은 
오직 설교에만 매달릴 뿐 다른 방면에는 무심하기도 했
지만 실제로 그의 삶 
속에서 그 모든 목회 활동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런 중에서도 몇 가지 그
의 목회에 특이한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주일 낮 시간의 공기도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관행
은 주일 오전 대 예배시간에 으레 당회원들 곧 장로들이 대표기도를 하는 것
이 관행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박윤선 목사가 3년 동안 장로의 대표기도 하
는 것을 거의 본 일이 없다. 박 목사의 주장은 주일 낮 예배의 기도는 제사
장적 기도로서 목사가 대표로 기도하는 것을 옳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것이 화란이나 미국 개혁파 교회들의 원칙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는 장로가 기도하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예배에 동참하는 데는 의의가 있으
나 문제는 일주일 동안 전혀 준비가 안 된 장로들이 증언부언하기 쉽고, 교
리적으로 맞지 않는 기도도 많으며, 교회와 교인들의 상황을 알지 못한 채 
기도함으로 성의가 없고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므로 박윤선 목사님의 주일 낮 예배 기도는 목회자가 하는 것으로 굳어
지므로 그것은 전통이 되었다. 오늘 날 한국교회의 관행과 비교해 볼 때 시
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개혁교회의 전통은 목사이외의 사람이 대 예배 시
에 기도하는 법은 없다. 

그 다음 박윤선 목사의 목회 행정과 정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데로 그는 신학자이며 성경 주석가이지 전문 목
회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목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졌다는 것은 그
는 말씀으로 증거 하는 설교에 대한 타는 듯한 열정을 가졌다는 것이지 목회
다운 목회를 하지는 않았다. 
또 그는 건망증이 너무 많았다. 그 건망증이란 바로 오직 성경을 묵상하고 
해석하는 일에 모든 신경과 정성을 한 곳에 쏟았기에 심지어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즉 어떤 때는 반찬만 계속 먹다가 또 어떤 때는 밥만 계속 먹는 등 
일반 사람으로서 거의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많았다. 
우산을 들고 나가면 가져오는 법이 없고 모자를 거꾸로 쓰는 것도 보통이었
다. 하여간 일반인들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전력투
구하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분이었다. 그러니 그런 분이 목회 행정이
나 정치를 옳게 하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 중에도 특이한 몇 가지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그의 목회는 그
의 주석의 원리와 설교의 원리처럼 언제나 하나님 중
심의 목회였다. 1962년 6월 10일 정부는 화폐개혁을 주일 날 단행했다. 그러
므로 주일 날 교회의 모든 재정을 정리하고 돈을 바꾸지 않으면 옛날 돈은 
한 낱 휴지에 불과 하게 되었다. 이 때 박윤선 목사와 제직회는 교회의 사명
과 주일 성수를 지키기 위해서 교회의 모든 돈을 포기해 버렸다. 
필자는 그 후에도 그전에도 화폐개혁 하던 날 어느 교회가 교회의 모든 제정
을 포기하면서까지 주일 성수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환난 때 
도리어 신앙의 진수를 알 수 있듯이 박 목사님과 동산교회가 보여 준 신앙
적 태도는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한 번 제직으로 세우면 특별한 권
징을 받지 않는 한 언제나 서리 집사로 재임명하는 것이 관계였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는 1963년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1963년에 재직을 임명하면서 
전년도의 재직을 하나도 임명하지 않고 일년동안 쉬게 했다. 
그 이유는 자칫 집사의 직분이 마치 세상에 명예직인 듯이 생각하는 폐단을 
방지하고 고요히 아무 직분이 없는 평신도로서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성실
히 봉사하는 훈련을 받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과연 그 결단은 교회의 신선
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런 특단의 조치는 박윤선 목사니까 가능했을 터이고 만에 하나 다
른 목회자가 그리했다가는 교회에 큰 환난과 시험이 와서 교회의 존립이 위
태로울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는 박윤선 목사의 목회에 아주 특이한 사
건이 아닐 수 없다. 

셋째로 박윤선 목사님의 목회는 철저한 위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앞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지만 박 목사님은 성경주석 쓰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
고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성경연구에 주력하였기에 실제로 일반적 의미
의 목회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목회의 모든 것을 부 목사에게 맡기었다. 그
런데 결과적으로 목회자가 부 교역자에게 위임하는 것이 오늘의 목회학 이론
에 가장 중요하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관리 감독하고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 할 뿐 아니라 비
효율적이라는 것이 현재 목회 이론이다. 그리고 박윤선 목사의 목회는 일종
의 역할 분담을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목회에 있어서 프로그램 
개발, 전도, 새가족 사역, 교회 교육, 심방, 
교회 행정, 구역관리, 제자훈
련 등 중요한 것이 많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부흥은 설교가 결정적이다. 이
는 최근의 성공적인 목회자들의 일반적인 증언이다. 
박윤선 목사는 동산 교회를 개척해서 비록 3년의 짧은 기간이기는 해도 교
육, 행정, 심방 등은 부목에게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하
나만으로도 성공한 모델이 되었다. 박윤선 목사는 비록 목회 전반에 걸쳐서 
대부분을 부교역자에게 위임하고 말씀증거에 생사를 걸었다. 그래서 교회의 
모습을 제대로 이루었고 교회가 부흥되었다. 아마도 이런 목회 스타일도 오
늘은 귀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가면서

박윤선 목사님이 비록 한 교회에 전적으로 매달려 목회한 목사는 아니었지
만, 성경에서 가르친 대로의 목회를 잘 감당한 목사였다. 왜냐하면 사도행
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성장하면서 교회 안에 헬라파 유대인들
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긴장이 고조되고 교회분열의 직전까지 갔을 때 사도
들이 모여 진지하게 회의를 했다. 그 때 얻은 결론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
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6:2) “우리는 기
도하
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6:4)고 했다. 
현대 목회가 너무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리고 인본주의적인 발상이 판을 치
는 때에, 오직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겠다는 사도들의 고백
과 결심은 교회를 교회되게, 말씀을 말씀되게, 은혜를 은혜 되게 했다. 그렇
게 볼 때 박윤선 목사님의 목회는 오직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
무하는 가장 성경적 목회의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