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Barnes의 예수를 바라보자 (“Seeing Jesus”)_역자 이대우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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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Barnes의 예수를 바라보자 (“Seeing Jesus”)

역자 이대우 장로/ ALM복음회 회장, 벨직신앙고백해설 저자 

인성 안에 감추어진 신성을 보라

1. 육체를 갖게 된 하나님을 찬양하라 

성경에 의하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의 모양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만으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신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
신 바,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를 제자들은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들은 “우리가 영광을 보았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그리스도의 영광은 
지금 세상이 볼 수 없게 숨겨져 있으나, 참 믿는 자들에게는 보여지는 것이다
(요 14:19). 
예술가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제외하고 그림이나 조각을 만든다면, 
그 결과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던 때와, 지금 영광을 누리
시는 참 하
나님이신 그리스도와는 무한정하게 다른 형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실상 
예술가들은 십계명의 제2계명은 제외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다. 사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손상시킨다. 사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
내는 것인가?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 언젠가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이 인도의 도나버(Dohnavur)에 있는 고아원에서, 
그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사진이 잘못된 것을 자신이 어떻게 배웠는가를 말하
면서, 인도에서 전도생활을 하는 선교사들 간에는 예수님의 사진이 거의 세계
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지만, 그 고아원에서는 예수님의 사진을 걷어치웠다고 
한다. 
또한 말하기를,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가 될 때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진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특별한 설명을 해 주기 전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사진을 
소유해도 좋은 것으로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진 없이 자라온 
여러분은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그리스도가 사진에서 보는 그리스도와는 판이
하게 다른 것을 알고 있다. 언젠가 여러분 중에 한 분이 성전에 서 있는 어
린 주님의 사진을 받고 
얼마나 실망했던 것을 나는 잊어버릴 수 없다. 소포
를 열고 상자 속에서 그 사진을 꺼낸 그는 실망의 눈물을 흘렸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께서 이 그림보다 더 훨씬 아름답다
고 생각했거든요”라고 하였다. “우리가 말하는 상대에게 하나님의 역사로 
성령의 감동을 남겨놓는다면 그들에게 사진보다도 더 아름다운 그리스도를 보
여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존 오웬(John Owen)은 신학적인 용어를 써서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은 입장을 
설명한 바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하여 긴 강연의 결론으로 “그
리스도의 영광은 어떤 피조물이 지닐 수 있는 것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차원이
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진을 가지고 그
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헛된 것이며, 또 우상
을 숭배하는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무와 돌을 깎아 사람의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색깔과 찬
란한 예술을 통하여 그것을 찬양하며, 미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영
광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도록 인도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림이나 조각
을 만
든 다음에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는 것”
(사 46:6)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마치 선지자들이 말한 바 영광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흡사한 형상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만, 그 그림 속에 존경할 만한 것이 있는가? 어떠한 근사한 것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이러한 형상은 사람의 생각을 진리와 사실에서 떠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
법이 아니겠는가? 이 형상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르치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그림과 조각
으로 된 형상은 참된 생각을 다 말살하게 한다.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공
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지니고 있는 영광스러운 신성에 대한 본질을 사람이 만든 형상들로 선포할 
수 있는가?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형상들이 잠시동안
의 즐거움이 될지 몰라도, 그 형상들이 주는 혼돈은 그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게는 그
들이 실천하여야 할 더 영광스러운 목표가 있다.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제2계명이 말씀하시는 자체가 형상에 대한 논쟁의 충
분한 결론이 된다. 그러나 그림이 교육자료가 될 수 있다는 왜곡된 생각이 가
져오는 심각한 문제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오류는 상당한 고집
을 가지고 있다. 어떤 신자가 그리스도의 그림을 집안에나, 예배드리는 곳에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그 그림이 보여주는 이상의 그리
스도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 그 그림이 그를 돕지 못하고 있으
며, 신앙을 돈독하게 하거나 이해하는 일을 돕지 못하고, 그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 그림은 없애 버려야 한다. 

2. 교회의 간증 

슬픈 일이지만, 우리가 지금 의논하고 있는 이 과제에 대하여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견해가 명료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만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배울 수 있다. 제일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사진이 등
장한 것이 라이온스(Lyons)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오스(Irenaeus: 130~200AD)라
고 짐작한다. 이레니오스는 사도 요한을 알고 있던 서머나의 폴리캅
(Polycarp 
of Smyrna: 69~155AD)과 친지였으므로 그의 작품들이 사도들이 가
르치는 것과 별로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 중에 ‘이단을 대항함(Against Heresies)’을 보고 알게 되는 것
은, 이레니오스는 신비주의(Gnostic)와 대결하여 싸웠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에는, “신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고 있으며, 그 작품들은 그림
이거나, 물질을 서로 연결하여 만든 공예품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모양을 지닌 그림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던 당시 빌라도(Pilate)
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초상들은 그것이 그려졌거나 조각되었든 
간에 신비주의의 냄새가 나며, 이교(異敎)적 영향을 받고 있다. 
다음에 살펴보아야 할 작품은 잘 알려진 그리스도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Eusebius of Caesarea: 260~340AD)의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에게 누이가 있
었고, 그 이름은 콘스탄티어이고, 그녀는 유세비우스에게 그리스도의 초상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유세비우스는 아주 신랄한 어조로 그녀에게 다음과 같
이 답변을 했다. “어떤 교회나 어떤 개인이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
다는 얘기를 당신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초상화는 세상에서 없어졌으
며, 교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거절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초상
화가 교회에서 금지된 것은 상식이 아닌가?”라고 했다. 그후 유세비우스는 
어떤 여인이 지니고 있던 그림(바울과 그리스도가 같이 서 있는)을 빼앗아 그
것을 찢어 버렸다. 
유세비우스의 처사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유세비우스가 불분명한 사실
을 가지고 황제를 대하던 태도는 참으로 존경을 받을 만하였다. 그는 콘스탄
틴의 초상화를 니케아 공의회(Councel of Nicaea)에서 그렸고, 그 제목을 
‘하늘에서 보내온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였다. 유세비우스가 황제의 누이
가 요청한 예수님의 초상화를 거절할 용기가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확실한 신
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가 거절할 이유를 잘 설명하고 적합하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반영임을 짐작
한다. 이 사실을 예술 역사가 마이클 고우(Michael Gough)가 말한 바, “초
대 교회시대 이전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엮은 일화나, 수난 당하신 얘
기나, 십자가의 수난에 대한 얘기를 초상화 하는 것은 
전적으로 제외 되었었
다”라고 한 것으로 증명한다. 
동방과 서방의 중세 교회는 점차로 기독교를 소개하는데 있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을 제시하기 시작했고, 이 문제를 종교개혁 시에 논쟁하였고, 원래
(元來) 초대교회와 같이 형상을 부정하며 설교하는 일에 도전하게 되었다. 칼
빈은 그리스도를 사진으로 제시하는 것을 거절하였으며, 그의 견해는 17세기 
청교도들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이에 대한 청교도들의 신조는 웨스트민스터
(Westminster) 대교리문답, 제109항에 공식화되었다.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못 깨닫
고, 그리스도인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예술인이 될 수 없다거나, 종
교적인 그림이나 조각을 만들 수 없다고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모세가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게 하신”(출 25:18-20)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술을 인정하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이 
소책자에도 예술을 인정함에는 변화가 없다. 역사가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이 진술한 것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는 말하기를, “암흑시대에 있어 예술에 큰 조화
를 가졌던 두 사람이 있는
데, 그 두 사람은 황제 디오필로스(Theophilus)와 오리언스의 감독 디오돌프
(Theodurf)이다. 그들은 ‘성상파괴파’(Iconoclast)이거나 성화를 반대하는 
자들(anti-Iconodult)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예술에 대
해서는 긍정적인 사람들이었다. 16세기에 칼빈은 “조각과 그림을 그리는 재
주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선물이다”라고 하였다. 

3. 시대적 급선무 

시대가 요구하는 두 가지 급선무는 진실하고 건전한 신앙을 소유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말씀을 설교하는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 교회는 다시 
부흥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없고서는 교회는 점점 타락하고 부패될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믿음으로 살며, 보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고후 
5:7) 우리는 천국을 본 일이 없고, 그리스도를 본 일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
도인들은 마치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바라본다(고후 3:18). 우리
는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하여 앞을 바라보며 나아간다. 그 이
유는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우리가 볼 수 있는 일
은 그가 먼저 우리에게 나타나셔야 되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을 확신해 가며 살아야 한다. 17세기에 청교도 존 오
웬(John Owen)은 두 가지 방법이 서로 대조가 됨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로마 교회가 말하기를 “신앙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의 형상과 또 다른 그리스
도의 형상을 직접 눈으로 보며,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라보는 것이 그
리스도의 영광이다”라고 믿으며, 이것이 복음에서 나타나며, 다른 곳에서는 
올 수가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림이나 형상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리스
도를 바라보는 방법이 성경에서 멀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
기 위하여서는 그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입각한 명료한 설교를 하는 데에서만 
온다. 
갈라디아서에서 징계하는 말씀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리
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사도 바울이 십자가상
에 죽어 있는 그리스도의 그림을 가지고 다니면서 보임으로 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바울은 성령께서 안수하심으로, 그 설교
가 마치 말로 된 그림처럼 된다는 것이다. 마틴 루터가 비유로 말하기를 “내
가 설교의 말씀으로 그린 그림보다 더 선명하고 확실하게 색을 써서 그릴 그
림이 없다. 여러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장 미련하게도 그림에 매혹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설교에서 현혹되어 있는 부분이다. 강단에는 이단이 우
글거리며, 미신과 막연한 얘기로 가득 차 있다. 설교에 나오는 끝없는 논쟁
이 끼치는 영향을 전혀 볼 수가 없다. 이들 설교는 마음의 죄를 깨닫지도 못
하고, 또 마음을 상하게 하지도 못한다. 어떻게 보든 간에 그들의 설교가 
‘은혜의 복음을 그린 선명한 그림’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세계는 깊은 잠을 자고 있다. 오로지 큰 경종을 울려야만 그들
이 깨어날 수 있다. 타락한 교회를 소생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하늘에서 받는 
감격을 가지고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 부어 교회의 
부흥을 계획하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어떤 다른 방법을 통
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