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과제들과 교회 및 그 신학_김영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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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과제들과 교회 및 그 신학

김영규 목사-개혁주의성경연구소장

들어가는 말

칸트나 에드문트 훗설이 제 과학들과 철학 자체를 비판하듯이 문명 혹은 문화
로 인한 사실과 자연적 사실, 혹은 자연적 사실이나 자연주의적 사실과 있는 
그대로의 사실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런 구별들은 제 과학을 비판하
는데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원리적으로 그런 사실들 중 
어느 사실에도 기초하거나 의존하고 있지 않고 신적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 
즉 무로부터 인격적 대상을 창조하시고 그 인격적 대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스
스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그런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 다른 종교나 일반 학문들과 기독교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
구하고, 기독교의 진리가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신 사실에 의존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의미로서 계시된 사실들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
에 질적인 무한한 비약 때문에 처음부터 독단적
이라는 점이다. 어느 정도 닫
힌 체계로 되어 있는 생명체들에게 그런 계시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혹은 
명령적이든 설명적이든 관계없이 독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다른 의미로서 
자신과 동일할 정도로 높은 차원에서 다른 인격체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그 창조와 더불어 모든 것이 있도록 은혜를 주신 바로 그 창조자가 스스로 나
타내시기 전까지는 피조된 자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독단적이
지 않고 적응적이고 설득적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기본 의미들에 따라서 신학
이 제 학문과 대화할 수 있다. 

문화와 사실의 구별

플라톤은 그의 언어 정의들에 대해서 다룰 때, 그 당시 법에 대한 통용되는 
그리스 정신을 반영하여 소위 헌법(노모스)과 법률(패피스마 혹은 도그마)을 
구별하여 정의하였다. 고상한 권위를 가진 한 개인의 횡포에 의해서 이루어지
든, 합리성을 내세우는 다수의 횡포에 의해서 이루어지든, 근원적으로 그 모
든 법들은 개인에게 독단적인 성격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권위
의 상징으로서 그런 법은 민주사회로 점점 발전된 현대사회에 중요한 기틀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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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리스 문화는 올림픽 대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치사회
로 가는 현대사회의 핵심 기능의 내용에 들어와 있다. 일찍이 헬라-로마 문화
권 안에 있었던 유대인들이나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모세의 책이나 구약 전체
에 대해서 플라톤의 정의의 면에서 전자의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종종 하나님
의 이름으로 후자의 용어를 성경에 대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세기의 요셉푸스는 후자의 용어에 따라 구약의 모든 기록들을 신
의 도그마라고 칭하였고 역시 신약의 사도들을 계승한 로마의 클레멘트와 이
그나티우스도 신약의 모든 기록들을 후자의 개념에 따라 주님과 사도들의 도
그마라고 칭하였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물론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의 도시
문화사회들은 정기적으로 혹은 임시적으로 모인 민회나 관원회의(원로원 회
의)를 통해서 결정된 결정사항들을 선포하는 수많은 비문들을 남긴 것처럼, 
역시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난 대로 교회의 첫 사도들과 장로들도 그 회의의 
결정된 사항들을 후기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의 발전된 도그마의 문서형식에 따
라 교회들에게 편지하였다. 

그 편지는 오래된 
근동사회나 그리스, 헬라, 로마시대에 시장 앞이나 성전 앞
에 세운 비문들처럼 후기 로마사회에 볼 수 있는 하나의 고대의 문서출판의 
한 방식이었다. 이미 성경에는 그렇게 당시대의 문명과 문화의 흔적이 있지
만, 시대적 문명과 문화의 상대적 오류들이 성경에는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
에 대해서 이레니우스 이래 계속 교회는 성경에 그런 오류가 없음을 주장해 
왔다. 

그런 문화적 흔적은 마치 현대사회의 뿌리에 있는 변형된 외래 문화의 영향
에 비해, 헬라시대나 로마시대에 일정한 거리마다 있는 우편국에 3시간 혹은 
2시간 단위로 문서들이 도착하는 유명한 포발제도가 현대사회에 미친 형식적
인 내용과 비교될 수 있다. 여러 민족사회에 수용이 되고 있는 그런 문화들
은 지배문화라기 보다는 합리적 문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가 진리와 문화를 구별할 수 있듯이, 지금 문화와 사실을 구별
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석기시대의 문화가 우리에
게 남아 있다고 해도 태평양 조그만 섬에도 남아 있는 석기문화와 고대 근동
사회의 석기문화와는 시대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화
의 근원지
에서는 문화들이 쉽게 사라지고 빨리 지나간다. 문명과 문화의 근원지로부터 
먼 지역일수록 오래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문화 중 우리에게 남아 있
는 가장 오래되고 진정 자랑할만한 것이 있다면 우리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민족주의 입장에서 본 우리말과 객관적 사실로서의 우리말
은 서로 구별될 필요도 있다. 사실로서의 우리말은 우랄알타이 문화보다 오히
려 인도를 장기간 지배한 아리안족 문화 이전의 드라비다언어 문화와 만나고 
있다. 인도문명의 근원인 하플라문화가 아프리카의 사하라문화와 만나고 있다
면, 일부 우리의 기본 인칭명칭은 드라비다언어 문화와 만나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본 친족명칭들은 놀랍게도 아주 오래된 고대근동사
회의 셈문화와 함문화가 섞여 있었던 시대의 언어들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 시대적으로 아주 분명히 구별될 수 있는 ‘할아비’와 ‘할어미’의 경
우 주전 2400년 이후 ‘아비-할’과 ‘어미-할’의 언어방식 이전의 방식과 만나
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고대 슈메리언어 많은 단어들이 우리말과 많은 단어들이 일치하
는 드라
비다언어보다 더 우리말에 더 많이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순수
한 언어인 ‘독(항아리)’이란 칭호는 후대 게르만족의 언어와 우리말이 만나
는 ‘그릇’보다 오래된 주전 3000년대 토판들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용어이
다. 우리의 접속사 중에 ‘~ 와 ~’의 사용방식은 고대 셈족들(주전 2300년대)
과 만나는 문장 뒤의 ‘~며'(and)나 그리스 언어에서 볼 수 있는 단어 사이
의 ‘~ 과 ~’, 주전 2000년대의 셈족의 단어나 문장전의 ‘~우’ 혹은 ‘~와’, 역
사적 유럽 언어권(고대 이탈리아 언어, 켈트족 계열언어 등)에서 발달된 단
어 뒤의 ‘~과’와는 다른 방식으로서 사라진 옛 에블라토판들(주전 2400년 전)
에서만 볼 수 있다. 

확실히 모계를 통해서 유전된 미토콘드리아 DNA의 분석에 의해서도 한국인은 
몽고-퉁구스인이나 일본인, 우랄인보다 중동인, 드라비다인, 이란인에게 가깝
고 중동인들 중에 북쪽 터키인에게 가깝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역시 미토
콘드리아 DNA에 있어서 몽고-퉁구스인보다 가까운 고대 게르만족이나 고대 그
리스인들의 경우에도 적어도 ‘불’이
란 용어를 같이 사용하면서 함께 거주하였
던 시기에 ‘하나’, ‘둘’, ‘많이’와 같은 숫자문화도 함께 공유하여 살았을 가
능성이 높다. 

우리의 고대유물 중 독특한 여신상의 경우, 실제로 고대 터키 땅의 세계 최
초 도시문화의 여신상과 일치되는 점과 그 유적에 나온 인물상이 동양적이라
는 점도 간과될 것이 아니다. 지금 그런 뿌리 찾기를 통해서 세계를 향해 가
는 한국사회나 글로벌사회로 가는 모든 사회는 고유한 문화보다 객관적 사실
을 향해 가야 할 것이다.

비가역적 사실들과 신학

순수학문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비가역적 사실들을 발견하고자 추구하고 
있다. 토마스 쿤은 과학적 혁명의 구조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비가역적 사실들
의 누적이란 개념을 발견하였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에만 초점을 둔 나머지 역
사적 상대주의 및 회의주의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나 각 나라가 자신의 민
족주의로부터 벗어나 세계의 한 문화권을 위해서 좀 더 공헌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 숨어 있는 비가역적 사실들의 누적에 초점을 맞추어야 볼 필요가 있
다. 

교회와 그 신학이 만나는 부분은 이런 
누적된 비가역적 사실들과 만나고 있
다. 성경은 창조의 기록을 통해서 우주의 기원을 과학적 환원주의처럼 원리
로 돌아가 축소되기를 원치 않고 인격체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나머지 
모든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그 인격체가 어떤 인격체로 존재하는지를 보여주
고 있다. 다만 그 인격체는 우주보다 크고 그것에 초월해 있기 때문에, 피조
물 세계의 어떤 표상으로 대신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빛과 그 만물의 창조성 
사이에 우주의 존재 근원과 목적으로서 그 인격체의 속성들이 있다. 

그 인격체의 역사에는 창조보다 먼저 어떤 역사가 있다는 점에서 그 속성들
과 창조 사이에는 영원한 작정이나 예정에 대한 계시가 있다. 인류의 기원과 
발전 및 멸망은 지구나 우주의 기원과 파괴, 사람의 계속적 고통과 죽음보다 
훨씬 깊은 데 있다는 말이다. 죄란 창조자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치명적 사건으
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식의 지향성의 돌발적인 비가역적인 전환이 원인이 되
어 양심, 심리적 도피 행위, 거짓, 핑계, 고통, 살인 등으로 발전된 것이다.

구원이란 이런 죄로부터 창조자의 특별한 초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담론들
과 제 과학의 물음들이 이런 문제와 관계가 없는 물음들이기 때문에, 
신학은 제 과학의 체계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비판적이다. 태양도 중심이 아
니요 지구도 중심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도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모든 원리들이나 전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기반이요 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빛은 비가역적이고 그 속도는 영원한 상수이기 때문에 태초의 정
보나 우주 밖의 정보가 인간에게 도달할 수 없다면, 그 비가역성과 그 속도, 
열역학 제2 법칙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것이다. 광자나 중성미자 등 소립자들
의 속도나 자체의 스핀의 방향과 속도가 우주의 태초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
할 때도, 조그만 생명체가 갖는 닫힌세계와 열린세계의 균형점,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에 여러 형태의 스칼라-벡타 공간들 사이의 경계점들이 보존되고 있
는 한, 극저물리학에 있어서 빛의 정지나 엔트로피의 제로의 경계들인 우주
의 한계 영역을 포함한 모든 것을 동시에 생각해야 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우주는 수많은 불변의 상수들(프랑크 상수, 빛의 속도, 중력상수, 최근 변한
다고 알려진 알파상수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체세포복제에 의한 고등동물의 복제나 인간복제, 인간과 같은 로봇의 제
작에 대해서 교회가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로부터 인간의 창조
와 남자의 뼈로부터 여자의 창조,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기적이 있기 때
문이다. 오히려 그런 비가역적 사실들의 발견을 통해서 그런 기적을 더 잘 이
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자연에 가까운 창조물을 구현하고자 하면 할수록 
매개변수 혹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변수들이 차원적으로 그리고 기하급수적으
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인간의 치명적 인자들인 지향성에 의해서만 인식하는 인식구조나 항
상 구체적 표상을 추구하는 판명성의 오류 때문에, 환경을 동시에 창조하지 
못하는 제 2의 창조물들은 첫 창조를 파괴하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 의식이나 마음이란 비유로 있는 것이요 그로부터 산출된 수학적 개념이
나 표상들은 첫 창조의 자연에는 없다. 이런 인간인자들에 의해서 이미 파괴
해 버린 시공간세계 밖에서는 우주 자체가 인간의 실수와 죄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기억 정보 덩어리일 수 있다. 

맺는 말: 바른 교회와 바른 신학에 대해서

그러나 성경은 우주 창조를 더 좋은 선물을 위한 예비 선물로 소개하고 있
다. 더 좋은 선물이란 우주를 선물로 줄만큼 그 가치를 높인 인간에게 창조
자 자신까지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선물로 받을 만큼 고귀한 존
재로 초대받기 위해서는 그 삶의 내용과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야 했다. 그 
삶의 내용과 방식이 처음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라
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런 가치의 내용을 인간이 그 모든 역사를 통해서 이해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이스라엘과 지금 온 세계로 확대된 교회와 맺은 하나님
의 영원한 언약의 내용이다. 타락한 인간은 이런 선물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하여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라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자유
성과 공적에 집착하였던 것이다. 

이런 집착이 근원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속성들에 대해서, 창조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
에 대해서, 성령에 의한 구원의 효과들에 대해서, 마지막 이 모든 것의 가장 
먼 원인으로서 영원한 예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처음부
터 세상과 그 가치기준이 달라 핍박받고 있는 교회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왔다. 

바른 교회의 사명과 바른 신학은 이런 성경의 기본 선포들을 어떤 원인이나 
형태로도 가감하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교회의 존립이나 그 안에서 이루어
지는 언어활동(학문, 설교, 정치, 권징 등), 예배의식, 생활, 사고, 휴식까지
도 그런 독특한 삶의 원리와 내용을 보존하고 빼앗기지 않게 하며 오히려 잘 
구현화 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바른 교회, 바른 신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