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_이재섭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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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재섭 선교사

1. 네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저희 가족은 1997년 1월 23일 카자흐스탄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당시
수도였던 알마타에서 서북부 쪽으로 약 2,800km 떨어진 우랄스크에 도착
하자 온통 눈으로 뒤덮힌 백설의 나라였습니다. 혹독한 추위와 연일 내리
는 눈으로 햇볕을 구경하기 힘든 환경 속에서 자녀들 모두 취학을 시켰습
니다. 집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학교까지 약 20여분간 자녀들과 눈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저는 이 도시를 지키는 유일한 선교사로서 사역에 들어갔습니다. 현지
교회를 맡은 지 두 달이 채 못되어 6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
다. 하지만 선교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단은
멀고도 낯선 땅까지 어김없이 찾아와 갖은 공격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쌓인 눈을 밟으며 학교를 가던 찬미가 “아빠 나 숨쉬기 힘들
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찬미는 숨이 가빠오면서 기운을 잃기
시작했
습니다. 그래서 찬미를 데리고 주립병원으로 갔습니다. 주립병원은
입원실이 없는데다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가는 것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담당 의사 선생님이 집에 그대로 두라고 한 후 매일
왕진을 와 주어 고마왔습니다. 하루는 왕진 온 주립병원 소아과 의사가
찬미의 몸을 살리더니 급히 입원실을 갖춘 큰 아동병원에 입원을 시킬 것
을 권유했습니다.
5층 이상 건물이 거의없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10층 규모의 큰 사립
아동병원이 있어 마음이 조금 놓였습니다. 서둘러 사라 선교사와 함께 찬
미를 입원을 시켰습니다. 외국인이 거의 찾아오지 않는 곳임에 비해 유일
하게 동양에서 온 환자여서인지 아동병원에서 가장 권위있는 의사 선생님
이 주치의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폐렴과 기관지염 증세가 가라않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호흡장애와 구토가 일어나 점차 상태가 심각해 지고 있음
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 사단이 찬미를 노리고 있으니 데리고 이 도시를 떠나라
입원 5일째 되던 날 집에서 찬미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사단이 찬미
를 노리고 있으니 곧 데리고 이 도시를 떠나라”는 
주님의 지시가 있었습
니다. 너무 놀라 가만히 있자 반복해서 똑같은 말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즉각적으로 병원 치료에 무언가 이상이 발생하고 있음을 느끼고 “예, 알
았습니다. 주님” 하자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병원을 찾아가자 마침
토요일이어서 주치의가 없었습니다. 월요일에 병원을 찾아가 찬미의 상태
를 묻자 담당 선생님이 호전되다가 다시 나빠지고 해서 뚜렷한 대책이 없
다고 하기에 퇴원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담당 의사가 찬미에 대한 앞으
로 계획을 묻기에 알마타로 데리고 갔다가 정히 어려우면 한국으로 가게
될 지 모르겠다고 하자 약을 챙겨 주었습니다. 심지어 그동안의 치료비를
안 받겠다면서 호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우랄스크에서 알마타로 가는 비행기가 자주 있지 않아 거의 한 주일이
지나서야 찬미와 둘이 알마타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알마타에 도착하자
선교사들이 자주 보였습니다. 이들은 알마타 병원은 입원비가 엄청나게
비싼데다 치료에 있어서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마침 숙소를 방문한 한 선교사님이 찬미에 대해 듣더니 알마타에
경희의료원이 지원하
는 경희크리닉이란 곳이 있는데 거기에 한국 연수를
다녀온 고려족 소아과 의사가 있다면서 내일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습니
다. 한국에서 알게 된 사이지만 그동안 병원이 어디에 있는 지 모르고 있
었는데 우리가 도착하기 하루 전에 우연히 만나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찬미는 심한 호흡곤란으로 거의 중퇴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
다. 이국 땅에서 생명이 위태로운 딸을 홀로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
로 밤을 세웠습니다.
아무도 함께 자리를 지켜주지 않았지만 대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저희를 부르셨기에 이 먼 나라까지 한 겨
울인 줄 알면서도 어린 자녀들과 함께 왔습니다. 또한 불의한 자들이 아
무리 우리를 해치려고 해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버텨왔습니다. 그
렇지만 이 어린 아이가 먼 땅에 와서 이대로 죽게 둘 수는 없지 않습니
까. 주님 우리 찬미를 살려 주세요.” 하고 밤을 세워 기도했습니다.

3. 내 딸은 내가 지킨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응답하셨습니다. “내 딸은 내가 지킨다. 너는
찬미가 네 소유라고 생각하지 말라. 찬미는 내 딸
이다. 나는 단지 찬미의
양육을 잠시 네게 맡겼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저의 불찰을 회개
했습니다. 한없이 길게 느껴진 밤을 넘긴 후 이튿날 아침 방문한 선교사
님 차를 타고 함께 경희크리닉을 찾아갔습니다. 소아과 의사이신 함미영
선생님은 고려족인데 비해 남편은 한국인 사업가였는데 비교적 한국어를
잘 해 찬미를 치료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함 선생님은 우랄
스크 병원 기록을 살피더니 “큰일났다. 이럴 수가…” 하면서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랄스크 병원에서 찬미에게 너무 많은 홀몬제를 먹여 심
한 중독증세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옆방으로 가서 원로
내과 의사이신 르두밀라 선생님께 알리자 오랫동안 긴급회의가 열렸습니
다.
루드밀라 선생님이 짠 홀몬 감량 및 응급처치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필
요한 약을 사기 위해 르두밀라 선생님이 직접 나서서 온 도시를 두루다니
며 약을 사 모았습니다.
찬미가 복용한 약은 [프레드니졸론]이란 것으로 5mg 용량을 일일 8개
씩 8일간 투약해 심장이나 위, 간 등 신체 주요 기관이 심한 손상을 입었
을 것으로 보인다며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라가 다르고 해서 이렇듯
치료 방법에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찬미를 데리고 급히 우랄스크를 곧 떠나라 하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경희크리닉에는 입원실이 없었던 탓에 밤에는 본인이 찬미를 간호하면서
의사가 가르쳐 준대로 주사와 투약을 맡고 아침에는 병원으로 옮겨 놓았
습니다. 르두밀라 선생님은 “찬미가 이미 저항력을 상실한 상태라 감기만
걸려도 죽게 된다. 식사 시간 외에는 반드시 재워야 한다”며 주의를 당부
했습니다. 이미 기력을 상실해 제대로 걸음도 못걷는 찬미를 옮길 때면
대개 업거나 택시를 타야 했습니다.

4.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마침 알마타에서 활동하고 계신 외과의 M박사는 찬미에게 청진기를 대
보더니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전혀 숨을 쉬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찬미의 응급조치를 시작한지 10일이 지나자 홀
몬제 양이 일일 2개까지 떨어져 서둘러 서울로 후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천호동 부활내과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부활내과
한통석 원장님께서는 선
교지에서 긴급히 후송된 찬미를 위해 친절히 무료
진료를 맡아주었습니다. 호흡조차 가다듬지 못하던 찬미를 소생시키기 위
해 2개월 동안 52병의 링거액과 함께 고가의 항생제를 비롯해 약제를 무
상으로 투여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기울어 주셨습니다. 후원자들께서도
찬미의 병실을 찾아와 기도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심폐 기능이 거
의 상실해 어깨 위로 힘겹게 숨을 쉬던 찬미가 점차 정상을 찾기 시작했
습니다. 그야말로 기적의 소생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악의 무리로 인해 현지에 남은 가족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
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찬미를 데리고 카자흐스탄을 향했습니다. 알마타
에 도착한 다음날 찬미의 건강이 다시 급격히 악화되어 고열과 함께 의식
불명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경희 크리닉으로 데리고 가자 함 선생
님이 사태가 심각하다며 바로 앰브런스를 불러 찬미를 큰 병원으로 옮기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있는 곳까지 약 3,000km나 떨어져 다
소 안정을 찾자마자 곧 우랄스크로 향했습니다.
찬미가 다가오는 겨울을 견딜 수 있을 지 다소 염려되었지만 새로운 사
역을 위해 
준비해 나가는 동안 현지인과 신뢰가 두터워져 갔습니다. 그러
나 방해 세력이 고위층에 압력을 가해 담당책임자들이 손을 놓고 말았습
니다. 이들은 불법체류자로 만들어 영구추방 하기 위해 거주허가를 3일로
줄이라고 지시했지만 출입관리국 경찰이 찬미가 아직 약한 상태임을 내새
워 10일로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둘러 국제공항이 있는 알마타에 있
는 분께 협조를 요청했으나 선뜻 응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우즈벡
타쉬켄트 공항과 인접한 침켄트 지역으로 연락을 취한 후 기차로 철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5일간 현지를 수습한 후 기차역으로 나가려 하자 밤
1시에 출발하는 기차였음에도 10여명의 현지인들이 찾아와 석별을 아쉬워
하며 짐을 날라주고 먼길을 가는 동안 기차에서 먹으라며 음식을 챙겨 주
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마치 고향을 떠나는 듯 착잡한 심정으로 기차에
올랐습니다.

5.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무려 36시간 동안 약 2,000km나 떨어진 광활한 대륙을 지나 침켄트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도 사단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직
카자흐스탄 정부가 이따금 
교회 허가를 해 주고 있음에도 누군가가 교회
허가를 받기 어렵도록 조치해 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며
측근 현지인들과 교회 허가를 받기 위해 노력한 결과 드디어 새로운 교회
허가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해서 교회 허가를 기다리던
선교사들에게도 길이 열리기 되었던 것입니다.
위기 때마다 역사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후원자들의 기도
와 측근 현지인 성도님들, 출입관리국 경찰과 찬미가 다니던 영국 선교
부 샬롬 스쿨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도움은 두고 두고 잊지 못할 것입니
다. 방해 세력은 저희 가족 여권을 탈취하고 갖은 위협을 가해와 결국 더
이상 거주가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만큼 사역하라
는 뜻이었나 봅니다.
저희는 방해 세력을 피해 영국선교부가 제공한 숙소에 약 4개월 머물면
서 약 700km 떨어진 한국대사관을 오가며 여권을 재발급받아 무사히 한
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어떠한 환란과 역경 속에서도 선교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역 재개를 위해 기도하며 알아본 결과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이 비교적 아직 미전도 종족이 많고 이 시대의 선교지로 비
중이 큰 곳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 겨울에 영하 40도를 오르내리
는 추위와 선교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는 현실, 그리고 치안의 부
담을 간과할 수 없지만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
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예레미야 1:7,8)는 말씀을 따라 금
번 6월말 다시 온 가족이 시베리아의 한 도시를 향해 떠나기로 결정했습
니다.
찬미(10세)를 비롯한 기은(12세), 기성(9세) 세 자녀가 시베리아의 기후
에 견딜 수 있도록 위해 기도바랍니다. 또한 오직 믿음으로 선교에 임하
고 있는 저희 가족의 사역을 위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도록 한국 교회
성도님들의 기도를 당부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재섭목사(개신원 77회 졸업, 예장개혁 총회선교사,
한국외지선교회 소속 02-483-0734, 011-9061-6896)
후원구좌: 국민은행 042-21-0457-850(이재섭), 우체국 012740-0038711(이
재섭)
이재섭선교사 홈페이지:prayerhand.org, Email: p
rayerhand@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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