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아닌 길 _장창수 선교사

0
18

길 아닌 길
장창수 선교사
러시아의 숲속 길을 보면 러시아인이 한국인과 비슷한 점이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러시아의 숲속에는 사람들이 항상 다니는 길 외에 이리저리
편하게 통하는 다른 길들이 있다. 서구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숲이나 잔디
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길을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국민들은 자연을 보호
하기 위해 불편해도 주어진 길로만 다닌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이런 길
을 택하기보다 편리한 길을 만들어 걸어간다. 다시 말해 자신의 편리를 위
해 ‘길 아닌 길’을 만들어 나아간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길 이외
가로질러 생겨난 길을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잘 걷는다. 한국인도 ‘길
아닌 길’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예전 한국의 어느 신학원에서 공부할 때
였다. 장래 목회자들인 신학생들이 하학(下學) 버스를 먼저 타려고 큰길을
놔두고 조경(造景)되어 있는 언덕을 따라 급히 내려갔다. 원칙을 준수한 신
학생은 항상 서서 가기 마련이며 자리 양보
는 생각할 수도 없다. 교회 성
장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안 가릴 목회자 후보생들이었다.
이곳 러시아도 엄청난 문화유산을 자랑하지만 사람 사는 건물이나 공장 건
물들 그리고 도로들은 부실 공사 같은 인상을 받는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러시아의 중앙 도시들은 이 점에서 좀 예외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건
물들은 단단하게 보이지만 대체로 투박하며 편리성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
리고 건축 마무리가 잘 안되어 있다. 그 결과 새집에 들어간 사람은 큰 불
편을 겪는다. 다시 일일이 손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차량 도로는
헝겊을 댄 헌옷 같다. 그리고 울퉁불퉁하고 야트막한 구덩이가 많아 자동
차들이 쉽게 망가진다. 러시아에 도로나 개인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에는
하수구가 없다. 비만 오면 도로에 물이 고인다. 증발될 때까지 지나가는 자
동차들과 사람들에게 많은 불편을 준다. 이렇게 러시아에는 모든 것이 구
비되어 있지만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 항상 잠재하는 부실공사가 생각되었다.
우리의 경우 건설 현장에서 정품이 아닌 비품 건축자재들이 사용된다. 규
격은 같지만 
설계도가 지시하는 질보다 떨어지는 자재들을 사용한다. 공사
비를 남겨 부당한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하청이 거듭될수
록 공사는 부실하기 마련이다. 감독 관청도 뇌물을 먹고 눈감아 주었다. 우
리도 선진국처럼 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이 오래된 나쁜 관행이
결국 김 영삼 정권때 사회적인 문제로 한꺼번에 터졌다. 이는 그의 실정
(失政)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김영삼정부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는 비
겁한 행위였다. 정치인의 책임보다도 국민 의식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 사회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정당히 비판하지 못했다. 자신들
을 탓해야 했다. 우리들은 여전히 이성보다는 감정으로 남을 비판한다.
한국인의 문화는 반칙에 기반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중병 수
준을 훨씬 너머 고질병을 앓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힘든 원칙보다
자신에게 편리한 비원칙을 더 좋아하는 한국인과 러시아인의 정치는 당연
히 혼난스럽기 그지없다. 이 때문에 외국인들은 두 나라의 정치와 경제 현
상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 결과 외국인 자본가들은 두 나라에 마음놓
고 투자할 마음
을 갖지 못한다. 여차하면 자본을 철수할 기회를 찾는다. 이
는 결국 제2의 IMF사태를 초래시킬 수 있다. 이렇게 비원칙과 무원칙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와 같다.
한국 교회라고 이런 잘못된 사회 현상에서 제외되는가? 교회에서 성도들을
질적으로 바르게 양육시키지 못한 결과 일천만이라는 기독교인을 자랑해도
얼마전 한국은 IMF사태를 맞았다. 한국 교회의 외적 성장은 냉철한 반성
과 비판을 받아야 함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