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놀라운 속도로 전 유럽 대륙을 휩쓸고 지나갈
때, 구교는 곧 사라지고 진정한 개신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
에 실현되리라고 사람들은 예측하였다. 그러나 개혁은 기대와 같이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는 얼마 가지 않아 심각한 침체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먼저 농민전쟁 당시 루터는 처음에는 농민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살상을 서슴지 않는 과격함을 드러내자 그는 동조를 철회하고 더이
상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럽의 농민들 상당수가 개신교회를
배척하고 외면하였다.
다음 지나친 교리적 강조는 성도들의 도덕적 해이를 가져왔다. 이신칭의의
지나친 강조로 성도들은 책임 있는 삶보다는 은혜로 얻은 구원의 감격에만
몰입해 있었다. 그 결과 당시 구교도들보다 신교도들이 오히려 더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개혁의 지나친 강조였다. 개혁교회들은 단순한 교회 개혁만을 주장하
지 않았다. 정치,
문화, 교육 그리고 사회 전반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는
기득권을 누리고 변화보다는 안일을 추구하던 당시의 중상류층으로 개신교
회를 외면하게 하였다.
그리고 개신교회들의 분열이었다. 루터파, 칼빈파 그리고 즈빙글리파 등으
로 교회들은 일치점이나 타협을 찾지 못하고 분열되었다. 이런 혼란을 틈
타 재침례파와 같은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였다. 이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개신교회를 부정적으로 보게 하였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오늘 제84회 개혁총회를 맞게 되었다. 처음의 기대와
달리 본 교단은 상당한 정도의 침체국면을 맞고 있다. 종교개혁 당시의 교
회들처럼 본 교단이 겪는 쓰라린 침체는 그만한 이유들이 충분히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들을 보다 심도 깊게 검토하고 개혁의 햇불
이 더욱 타오르게 하는 총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총회는 교단이 갖는 정례회의이지 교단의 모든 것이 아니다. 총대들은 지
노회들과 지교회들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
을 개진하기 위해서 온 이들이 아니다. 개혁의 의지를 갖고 있는 지노회
회원들을 대표하여 온 이들이다. 그러
므로 그들의 모든 의지들이 집약되는
총회가 되어야 한다.
본 교단은 개혁의 열망으로 인하여 상당히 투쟁적이고 비타협적인 면을 지
니고 있다. 이로 인하여 본 교단 안에는 일치와 협력이 상실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이란 섬김의 극대화지 투쟁이 아니다. 사랑과
용서의 실현이지 비판과 고발의 개념이 아니다. 투쟁과 비판으로 상처투성
인 모습들을 보고 조용히 새롭게 시작된 본 교단이 다시 옛날의 장으로 돌
아간다면 다시 본 교단은 인간적인 교회 정치의 무대가 되고 말 것이다.
금번 총회는 섬기고 사랑하고 협력하려는 새로운 개혁의 모습으로 돌아가
야 한다.
우리는 개혁교단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총회는 지노회들을 대표하는 총대
들의 모임일 뿐이다. 총회가 교단이 아니고 물론 총회가 교단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총회는 항상 일회적으로 모이고 폐회 후에는 그 권
위가 지속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현실은 점점 모든 것이 총회에
집약 되고, 결과 몇 사람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주장되려는 위험에 처해
있다. 본 교단 내에 있는 전 교회와 전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가능성이 집
때, 구교는 곧 사라지고 진정한 개신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
에 실현되리라고 사람들은 예측하였다. 그러나 개혁은 기대와 같이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는 얼마 가지 않아 심각한 침체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먼저 농민전쟁 당시 루터는 처음에는 농민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살상을 서슴지 않는 과격함을 드러내자 그는 동조를 철회하고 더이
상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럽의 농민들 상당수가 개신교회를
배척하고 외면하였다.
다음 지나친 교리적 강조는 성도들의 도덕적 해이를 가져왔다. 이신칭의의
지나친 강조로 성도들은 책임 있는 삶보다는 은혜로 얻은 구원의 감격에만
몰입해 있었다. 그 결과 당시 구교도들보다 신교도들이 오히려 더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개혁의 지나친 강조였다. 개혁교회들은 단순한 교회 개혁만을 주장하
지 않았다. 정치,
문화, 교육 그리고 사회 전반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는
기득권을 누리고 변화보다는 안일을 추구하던 당시의 중상류층으로 개신교
회를 외면하게 하였다.
그리고 개신교회들의 분열이었다. 루터파, 칼빈파 그리고 즈빙글리파 등으
로 교회들은 일치점이나 타협을 찾지 못하고 분열되었다. 이런 혼란을 틈
타 재침례파와 같은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였다. 이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개신교회를 부정적으로 보게 하였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오늘 제84회 개혁총회를 맞게 되었다. 처음의 기대와
달리 본 교단은 상당한 정도의 침체국면을 맞고 있다. 종교개혁 당시의 교
회들처럼 본 교단이 겪는 쓰라린 침체는 그만한 이유들이 충분히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들을 보다 심도 깊게 검토하고 개혁의 햇불
이 더욱 타오르게 하는 총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총회는 교단이 갖는 정례회의이지 교단의 모든 것이 아니다. 총대들은 지
노회들과 지교회들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
을 개진하기 위해서 온 이들이 아니다. 개혁의 의지를 갖고 있는 지노회
회원들을 대표하여 온 이들이다. 그러
므로 그들의 모든 의지들이 집약되는
총회가 되어야 한다.
본 교단은 개혁의 열망으로 인하여 상당히 투쟁적이고 비타협적인 면을 지
니고 있다. 이로 인하여 본 교단 안에는 일치와 협력이 상실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이란 섬김의 극대화지 투쟁이 아니다. 사랑과
용서의 실현이지 비판과 고발의 개념이 아니다. 투쟁과 비판으로 상처투성
인 모습들을 보고 조용히 새롭게 시작된 본 교단이 다시 옛날의 장으로 돌
아간다면 다시 본 교단은 인간적인 교회 정치의 무대가 되고 말 것이다.
금번 총회는 섬기고 사랑하고 협력하려는 새로운 개혁의 모습으로 돌아가
야 한다.
우리는 개혁교단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총회는 지노회들을 대표하는 총대
들의 모임일 뿐이다. 총회가 교단이 아니고 물론 총회가 교단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총회는 항상 일회적으로 모이고 폐회 후에는 그 권
위가 지속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현실은 점점 모든 것이 총회에
집약 되고, 결과 몇 사람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주장되려는 위험에 처해
있다. 본 교단 내에 있는 전 교회와 전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가능성이 집
약되어 큰 힘으로 드러나도록 그 역할을 총회는 다하여야 한다. 이런 생산
적인 총회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