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참된 예배와 예전_임용민 목사

0
629

참된 예배와 예전

< 임용민 목사, 새소망교회 >

 

예배의 예전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속성에 맞추는 것에 전념해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율법주의나 형식주의를 말한다. 예를 들어 소위 전통적인 예배를 강조하면 율법주의자요, 예배의 자유를 모르는 형식주자라고 말한다. 반면에 인간적이고 감정적이며 현실적이어서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는 사람에 대해 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일국(一國)의 대통령이나 권력자를 만나는 것도 그에 합당한 의전이 있다. 이런 의전을 따라 대통령을 만나는 것에 대해 어떤 사람도 율법주의나 형식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예배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에게 좋은 예배를 생각한다. 이런 것을 더 좋아하고 은혜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대통령보다 못하게 대우하는 것이며, 권력자나 부자들보다 못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을 준수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가치를 엄중히 여겨서 이것을 “엄숙한 동맹으로 맺어진 나라”들 안에 ‘예배모범’을 전파하는 일에 신속히 하지 않는 공무원들이나, 이에 따르지 않거나 거부하는 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이것은 ‘예배모범’을 따라 예배하는 것이 율법주의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과 그의 속성에 합당한 순종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따라야 할 가장 시급한 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의 자의적 해석은 그 자체가 불법이 된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서문에서는 성경과 상관없이 헛된 의식을 따르게 했던 잉글랜드 공동 예식서가 “경건한 목사와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규례를 빼앗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여 큰 손해를 끼쳤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내용을 접해도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우리의 경험이나 감정을 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우리 자신이 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 구체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편리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예배를 고집할 것이다.

그러나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보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해 말할 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4문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신 분”이라고 설명한다. 이 말은 온 우주를 합쳐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와 비교할 수 없음을 설명한다.

성경에서 인간의 존재 가치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것에 있다고 말한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형상, 즉 의와 지식과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는 인간 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의 독특함이며, 이것이 인간의 가치를 말해 줄 뿐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은 크기도 작고, 살아가는 인생도 짧지만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했다는 사실에 가장 큰 존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가치를 성도됨에 묶어 둔다. 성도됨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신적 속성에 참여한 존재라고 설명한다. 우주에서 가장 작은 존재라 할 수 있는 인간이 성도로 부름을 받아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져 육체와 마음도 썩어지는 속성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이 신적 속성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불멸의 삶을 약속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 밖에 없다. 온 우주를 모두 뒤져봐도 그분을 능가하는 존재는 없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실이 복잡하고 우리를 힘들게 해도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보다 가치 있거나 앞서는 문제일 수 없다. 성도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만이 최고의 상급임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현실 인식이 이러하다면, 성도의 예배는 어떠해야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초하여 가장 하나님의 뜻과 그의 속성에 합당한 것을 추구해야지 않겠는가? 이러한 예배에 대한 가장 좋은 지침으로 우리에게는 바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신앙고백을 따라, 성경에 계시한 모든 진리를 당신의 속성을 따라 알리신 그대로 예배하도록 주신 복된 선물이다.

이것을 따르는 것은 형식주의나 율법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계시된 말씀의 작은 것이라도 보배롭게 여기는 경건이며, 경외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속성에 합당하게 예배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하나님 그분 자신을 능가하는 객관과 진리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우주의 찌기와 같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좇아가는 어리석음보다, 가장 지혜롭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알려주신 참된 예배의 방식보다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속성과 형편을 따라 예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그의 속성에 맞추는 것에 전념해야 한다. 우리의 감정과 정서에 맞느냐를 먼저 고려할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보다 중요한 하나님 그 분 자신과 그분의 말씀인 성경과, 전체 성경으로서 입증된 참된 예배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계명과 반대되는 일을 하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고집이며 범죄 하는 것이다”라고 칼빈이 말한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일에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