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은 유신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는가? _송인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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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은 유신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는가?

 

< 송인규 교수, 합신 조직신학 >

 

 

“유신진화론이 전 세대에 비해 훨씬 더 많이 그리스도인의 주목을 끌고 각광을 받는다고 해서 결코 동조할 수 없다.”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은 대체로 보아 “인간을 포함한 생물계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생물학적 진화론을 하나님의 섭리 방식으로 채택하는 신학 이론”이다. 그런데 근자에 유신진화론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일반 복음주의계에 편만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2005년의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미국 오순절 계통의 대학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학교에 따라 적게는 12%에서 많게는 27%가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반응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증가 추세는 상대성 이론 및 양자 역학의 득세 이후로 번지고 있는 신학과 자연 과학 사이의 밀월 관계, 포스트모던식 과학 철학의 유행, 이머징 처치 운동의 확산 등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의 가르침을 바른 신학의 골조로 삼고 있는 보수적 장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유신진화론을 타당한 이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아니오!”이다. 그러나 “아니오!”라는 부정적 답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가 무슨 근거에 의해 유신진화론을 반대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항을 언급할 수 있겠으나, 필자는 크게 두 부류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성경적·신학적 근거에 의한 반대

 

유신진화론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가 된다. 만일 유신진화론이 성경적 진리로 인정되려면 최소 세 가지 결론이 창세기 1, 2장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첫째, 창 1:21과 1:27에 등장하는 동사 ‘창조하다’(히브리어 ‘바라’)가 ‘자연 과정에 의한 발전’으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라’는 자연적 과정에 의한 현상을 묘사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특히 창 1:1에서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함의한다.

 

또 비록 창 1:21, 27의 ‘바라’는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고 기존 재료 – 들짐승과 새의 경우에는 ‘흙’(창 2:19)이, 수중 생물의 경우에는 ‘물’(창 1:20)이, 또 인간 신체의 경우에는 ‘흙’(창 2:7)이 -를 사용한 하나님의 역사를 묘사하지만, 어쨌든 이 역시 자연 과정에 의한 발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에 의한 창출 행위를 나타낸다. 이처럼 ‘바라’라는 용어가 유신진화론의 성립을 반대하게 만든다.

 

둘째, 유신진화론이 가능하려면 창세기 1장의 여러 곳(11, 12, 21, 24, 25절)에 등장하는 단어 ‘종류’(히브리어 ‘민’)가 오늘날 생물 분류학에서 거론되는 각종 명칭들 – ‘종’(種, species), ‘속’(屬, genus), ‘과’(科, family), ‘문’(門, phylum) 등 – 과 아무런 실질적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생물분류학에서는 모든 생물을 ‘계’(界, kingdom) → ‘문’(門, phylum) → ‘강’(綱, class) → ‘목’(目, order) → ‘과’(科, family) → ‘속’(屬, genus) → ‘종’(種, species)의 체계에 따라 분류한다. 가령 예를 들어 ‘사람’ 같으면, 동물계 → 척추동물문 → 포유류강 → 영장목 → 사람과 → 사람속 → 사람종으로 분류가 된다.]

구체적으로 각기 ‘종류’대로 창조된 생물체들 가운데 ‘동물’(창 1:25)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떤 이는 이 ‘종류’가 ‘종’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보다 더 상위 개념인 ‘속’이나 ‘과’ 또는 심지어 ‘문’까지도 가리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껏 양보하여 설사 이 ‘종류’가 ‘문’을 뜻한다고 해도 이로써 유신진화론의 입지가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신진화론은 생물학적 진화를 액면 그대로 인정하는 고로 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인간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점진적이고 자연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종류’를 생물학적 분류 가운데 아무리 높은 단계로 해석한다고 해도 이로써 유신진화론이 성립될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 또 유신진화론이 성립되려면 창 2:7의 ‘흙’(히브리어 ‘아파르’)이 인간 직전의 하등 동물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흙’이 하등 동물이라는 해석은 성경의 여러 증거로 보아 가당치 않다.

 

우선 만일 유신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이 하등 동물로부터 진화된 것이라면, 이미 흙으로부터 짐승이 창조된 이후(창 1:24-25)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창 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짐승’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으셨단 말인가?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 후 심판을 언명하실 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 3:19)라고 하기보다도, “너는 ‘짐승’이니 ‘짐승’으로 돌아갈지니라”라고 하셨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모든 성경의 증거들은 인간의 육신 창조에 있어서 사용된 재료가 하등 동물이 아니고 그저 흙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창 2:7의 ‘흙’을 ‘하등 동물’로 해석하는 것이 부당한 이상, 유신진화론 역시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유신진화론은 이처럼 성경의 증거와만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유신진화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아담이 인류 최초의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인물이라는 것, 아담의 영혼은 뇌로부터의 진화적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직접 창조에 의한 독립적 실체라는 것, 아담이 창조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존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등 동물을 다스리도록 문화 명령을 부여받았다는 것, 또 아담이 언약의 머리였던 고로 그의 범죄가 인류 후손에게 원죄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 로마서 5장이 예시하듯 첫 아담과 둘째 아담 사이에 대표자로서의 유비가 존재한다는 것 등 개혁 신학의 중요한 진리들이 왜곡되든지 폄하되든지 부인될 수 있다. 이처럼 유신진화론은 신학적으로도 커다란 위험의 소지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유신진화론은 이처럼 성경적·신학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보수적 장로 교회(및 개혁 신학)의 입장에서는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2. 과학적/이론적 근거에 의한 반대

 

비록 우리가 유신진화론을 반대하는 궁극적 이유는 이 이론이 성경의 진리와 개혁 신학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이지만, 부차적으로는 생물학적 진화론이 가진 이론적 문제점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에 생물학적 진화론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유신진화론에도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진화론이 지닌 과학적/이론적 문제점은 무엇인가? 필자는 여러 가지 사항 가운데에서도 두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생물학적 진화론이 가진 가장 큰 이론적 문제점은 그 이론의 주장 내용과 실증적 자료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화석의 증거에 관한 문제점이다.

 

화석은 과거에 일어난 생물학적 변화와 발전(혹은 사멸)을 보여 주는 숨김없는 기록이다. 그러므로 화석은 진화론을 입증할 유일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문제는 그러한 화석의 기록이 진화론의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모순처럼 작용하기도 한다는 데 있다.

 

만일 생물학적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발전을 나타내는 전이적 생물체에 대한 화석이 발견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화석의 증거는 미미하기 짝이 없고 많은 경우 그저 공백으로 남아 있다.

 

또 화석의 증거가 보여 주는 바에 의하면 어떤 생물체들의 경우에는 (분명 더 나은 형태로 진화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만 년 동안이나 아무런 변화를 나타내지 않은 채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새롭고 복잡한 구조의 생물체들이 어떤 시기의 화석 기록에 매우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일이다. 가장 특이한 예가 소위 말하는 ‘캄브리아기 폭발’(Cambrian explosion)이다.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약 5억 7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초기의 화석 담지(擔持) 퇴적암 안에서, 주요 해양 무척추 동물문(門)을 대표하는 모든 형태의 생물체들과 후손을 남기지 않은 다양한 다른 문들의 생물체들이 발견된 것이다. 화석의 증거만으로는 이토록 잘 발달된 무척추동물들이 어디서 유래하게 되었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진화론자들의 딱한 실정이다.

 

화석 증거의 불일치와 관련하여 생물학계 내에 매우 의미 심장한 사건은 1972년 엘드리지(Niles Eldridge, 1943∼)와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가 ‘계통적 점진주의에 대한 대안, 단속 평형설’(Punctuated Equilibria, an Alternative to Phyletic Gradualism)이라는 제하의 논문을 발표한 일이었다.

 

단속 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 theory)은 종의 분화를 설명함에 있어 다윈식의 점진적 변화 이론에 반기를 든다. 이는 새로운 종들이 신속히 발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전통적 이론에 수정을 가한 것이다. 즉, 종속 집단이 그 종의 주류 집단과 지리적으로 격리된 채 장시간이 흐르면 얼마 동안 평형 상태(equilibrium)에 도달해 이 상태를 유지하다가, 조건이 맞으면 돌발적으로 종의 분화가 일어난다는 식의 설명을 시도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전이적 형태는 지질학적 시간에서 한 순간에만 나타나고, 단지 오래 존속하는 지배적인 종들만이 화석에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전통적 진화론의 입장, 곧 다윈식의 점진주의(Darwinian gradualism)와 상당한 이론적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화적 변화의 주된 방식이 무엇인가와 관련하여 진화론자들 사이에 첨예한 의견 대립을 유발했다.

 

단속 평형설이 등장하여 전통적 진화 이론에 수정을 가한 것은 그 정도로 화석 증거의 불일치가 생물학적 진화론에 타격을 주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둘째, 대진화에 대한 증거 확보의 어려움은 생물학적 진화론의 목표인 바 공통 조상으로(common ancestry)부터의 계통 발생(phylogeny) 수립 노력을 거의 무위로 만든다.

 

오늘날 진화론자들은 생물계의 다양성을 공통 조상으로부터의 발전과 변화로 설명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이 꿈꾸는 이상이자 학문적 노력을 종종 ‘계통수’(phylogenetic tree of life)로 예시하곤 한다. 그러므로 계통수를 구성하는 ‘가지’와 ‘결절’(node)을 정확히 표시하면 할수록 생물학적 진화론은 과학으로서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요, 그러한 표시가 불투명하고 모호하면 할수록 단지 하나의 ‘이론’ 차원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의 현황을 보건대 그 전망은 매우 어두운 채로 남아 있다. 특히 한 생물체와 다른 생물체의 진화적 선후 관계를 이어주는 ‘결절’ 생물체들의 존재가 쉽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이미 생물학적 상식으로 되어 있는 ‘소진화’(microevolution)와 ‘대진화’(macroevolution)의 개념을 도입하고자 한다. 소진화는 보통 종의 분화 과정에 수반되는 작은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로 종 내부 혹은 집단 내부의 유전적 변이와 연관이 된다.

 

이 변화들은 지질학적 연대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짧은 기간에 걸쳐 발생하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사실적 주장과 이를 위한 검증이나 증명이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는 창조론자들까지도 기꺼이 인정하는 바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진화론이 만일 소진화의 범위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진화론에 대해서 하등의 반론을 제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진화론의 이론은 대진화의 메커니즘까지도 포함하고 있고, 오히려 이것이 훨씬 더 핵심적인 주장점으로 되어 있다. 대진화는 ‘종’ 수준 이상의 진화를 말하는데, 진화론자들은 이 방면에서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모든 자원들을 총동원한 가운데 공통 가계의 경로를 추적하고 재구성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실 계통수의 요체는 이렇듯 대진화의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대진화가 아무리 ‘관찰과 비교’ 작업을 성실히 한다 할지라도 소진화에서의 고찰과는 달리 온전히 ‘과학적이지 않은’ 탐구 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진화가 현재의 입수 가능한 자료로부터 과거의 사태를 소급적으로 추론해야 하는 통시적(通時的) 성격의 작업이기 때문에도 그렇고, 또 매우 불충분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연구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처럼 전반적 작업이 과학적으로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진화론의 숙명적 생리이다.

 

그리하여 1800년 대 생물학자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사안들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른 목(目)의 새들은 서로 간에 어떤 방식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가?” “원생 동물류(protozoan groups) 가운데 어떤 것이 후생 동물(metazoans)의 기원이 되었을까?” “어떻게 상이한 무척추 동물문들이 상호 관련을 맺고 있는가?” 등의 의문이 그러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확실한 바는 계통학적 분류의 낮은 수준으로 내려올수록 공통 조상을 추론하는 것이 쉽지만, 그 이상의 수준으로 올라가면 전혀 사정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강’(綱, class)이나 ‘문’(門, phylum) 같이 커다란 분류 범주 사이를 연관시키고 이로써 계통학적 재구성 작업을 시도하는 일은 자연 과학의 표준적 작업 – 반복된 실험과 검증에 의해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일 – 성격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진화론자들이 과거에 비해서 생물학적 진화론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훨씬 더 많이 확보되었다고 주장하고, 또 대다수의 진화론자들은 자기들의 학설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라고까지 말하곤 하지만 대진화의 이론이 아직도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어 있지 않다는 목하의 현실과 공통 조상으로부터의 계통 발생 수립의 전망이 그저 ‘헛된 희망’(wishful thinking)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감안할 때 생물학적 진화론의 학문적 위상은 아직도 의문 투성이라고 밖에 판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이렇게 불안정하고 전망이 흐린 생물학적 진화론을 핵심적 지지 이론으로 채택한 유신진화론에 대해서도 역시 의심과 비판의 눈초리를 감추기가 힘들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유신진화론이 전 세대에 비해 훨씬 더 많이 그리스도인의 주목을 끌고 각광을 받는다고 해서 이에 동조하는 것은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요동하는”(엡 4:14) 치졸한 모습이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의 진리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에 입각한 바른 신학의 기치를 높이 듦으로써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해야”(고후 10:5)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