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 (The Good Samaritan)
김성훈 집사/새누리교회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털리고 심하게 맞아서 거반 죽게되어 여리고 골짜
기에 방치된 채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외면당한 자를 사마리아 사람
이 지나다가 불쌍히 여겨 치료하여주고 주막에 데려다가 주인에게 부비를 주
고 회복을 위한 추가 치료를 의뢰하고 나중에 더 드는 비용을 지불하기 위
해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였다는 이야기,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
유’는 어지간한 불신자들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유명한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으로 관형화 되어 소
설 등에서 문학적인 소재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법조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자주 인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생각해봅니다.
대체로 우리는 이 비유를 불행한 상황에 처한 불쌍한 이웃을 구제하자는 실
천적 선행의 타이틀로만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
만 예수님께서 단지 ‘불쌍
한 이웃을 도우라’는 의미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겠는가 의문을 가져봄직
하지 않은가요?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동문서답같은 이 비유
를 말씀하시고 다시 묻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
이 되겠느냐?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
여야 한다. 그러면 나의 이웃이 누구냐? 대체로 우리는 이 비유를 ‘강도 만
난 자 소위 불행에 처한 사람을 이웃으로 보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선행을 행
하여야 한다’는 교훈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강도의 만난 자의 시점으로 두고 제사장, 레위
인, 사마리아인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나의 이웃이냐 묻고 계십니다.
우리의 옷을 벗기고 죽이려고 한 그 강도는 바로 사탄입니다. 우리를 꾀어
죄와 운명 속에 사로잡아 종노릇 하게 만드는 그 사탄은 이리나 도적과도 같
은 존재이며 그 목적은 오로지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입니다. 강도만난
자를 외면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삯군목자
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뜻합니다. 사탄에게 속아 모든 복
을 다 빼앗기고 고통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선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계십니다. 참된 목자되
신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우리가 구원 받을 유일한 이름이시
며, 그분만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마
리아인’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으
로 낮아지신 예수님 자신인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이었다는 것은 곧 그 곳을 떠난다는 것을 뜻하며, 주
막 주인에게 ‘잘 돌보아 주라’ 하면서 ‘돌아올 때 갚으리라’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 자신이 이 땅을 떠났다가 후에 다시 임하실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강도가 우리의 옷을 벗겼듯이 사탄은 우리의 허물을 오히려 들추어서 우리
로 하여금 죄로 인해 더욱 더 고통 받게 합니다. 한마디로 아픈데 또 찌르
는 것입니다.
술이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자던 노아의 허물을
감추어 주지 않고 오히려 드러
낸 함의 자손 가나안을 저주하신 이유도 함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탄의 속성을 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허물을 홀로 감당하시고 모든 상처를 치유하셨
습니다. 그는 오히려 세상적으로 소외되고 고통 받는 가난한 자, 병자, 세
리, 창기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진리를 깨우치시고 그 상처를 치유하
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바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오직 예수 만이 강도를 만나 고통 받는 우리의 ‘참 이웃’이요 ‘참 동반
자’인 것입니다.
율법사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6-
37)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는 것, 그것은 바로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