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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 최덕수 목사, 현산교회 >

 

“신학적 지식보다 경건의 실천을 중요시하는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는 열심을 내는 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적 추구에만 열을 올리는 형식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게을리 한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있는 신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깨끗케 하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될 것이며, 그가 나타나실 때에는 그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께 가까이(To be near unto God)’라는 책을 썼으며,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 야곱 슈페너는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이라는 책을 남겼다.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성화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 자신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런 사실들은 신앙의 선배들이 경건을 얼마나 사모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하지만 경건은 몇몇 사람들만이 추구하는 덕목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라면 예외 없이 추구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신자의 덕목이다.

그러면 어떻게 모든 신자들이 소원하는 경건을 이룰 수 있는가?

 

  1. 신자의 경건은 근본적으로 신앙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을 쓴 헨리 스쿠걸은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과 영혼의 연합이며, 바로 그런 상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경건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신앙을 ‘하나님과 영혼의 연합을 이루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경건한 삶에 참여하는 것’, 이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헨리 스쿠걸의 ‘참된 신앙’에 대한 정의는 신자로 하여금 경건을 추구할 때 범하기 쉬운 양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게 만들어 준다.

많은 신자들이 경건을 추구하다가 치우치는 한 극단은 신비주의다.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주관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한다.

수녀가 되고자 깊은 묵상과 종교적인 삶에 몰두하기를 원했지만 억지로 결혼했던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마담 기용은 예수의 이름을 자기 알몸에 새겼다고 한다. 테레사 수녀는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보고 정신을 잃었다고 하며, 주상 수도사였던 시몬 스틸리츠는 높은 기둥 꼭대기에서 살았다고 한다.

성 안토니는 믿음의 신비를 묵상하기 위해 이집트 사막 지역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일보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정열을 불태우는 일을 더 선호하면서 그것을 경건으로 착각한다.

경건을 추구하다가 치우치게 되는 또 다른 극단은 진정한 믿음을 갖지 못한 채 사람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형식주의다.

형식주의자들은 시선은 늘 사람을 향해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지 않은 채 경건을 추구하게 되면 ‘모양만의 경건’이란 사생아를 낳게 된다. 이는 내용은 빠져나가 버린 껍데기와 같다.

어떤 이들은 ‘참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이 경건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에서 보는 바대로 사람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경건을 이룰만한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경건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사람은 모양만의 경건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고 결국 위선과 외식으로 치우치게 된다.

 

  1. 성경은 신비주의와 형식주의라는 극단으로 치우친 신앙생활을 경계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분리된 채 하나님과의 교통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의 경건은 실제적인 삶의 내용이 없는 관념에 불과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낼 능력은 없으면서 형식과 규례에 얽매이는 형식주의자의 경건은 아무리 그럴듯한 모습을 드러내어도 어디까지나 단순한 도덕적인 삶에 불과하다.

대중 앞에 가르치는 자로 있는 지교회 교사인 목사들과 신학을 가르치는 보편 교회의 교사인 신학교 교수들은 신비주의와 형식주의, 이 둘 중에 어느 쪽으로 치우치기 쉬운가? 목회자들과 신학교 교수들 중에도 신비주의적인 신앙 칼라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대개 오랫동안 신학하는 환경에 있다 보면 가르치는 내용을 내면화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주의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은 자신이 습득한 신학적 지식으로 자기 경건을 위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생각으로는 믿고 지식적으로 논하기는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복음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물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적인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경건이 없는 지성은 무의미하며 도리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특히 복음에 대한 지성적인 이해에만 머무르고 복음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영혼은 물론 교회에도 상처를 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였던 토마스 할리 버톤이 젊었을 때 어느 노년의 목사님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한다. “성결케 되지 않은 학식은 교회에 아주 많은 해를 끼친다네”.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안다는 이들이 경건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때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갖게 만들 듯이, 개혁주의 신학을 논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견지하는 신학을 실제적인 삶과 교회를 통해 구현해내지 못하면 의도하지 않게 사람들에게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경건이란 지성보다 오히려 마음에 속한 것임에도 많은 이들이 지적인 작업을 하는 것으로 그쳐 버리기 때문이다. 신학의 부요함과 풍성함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이런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1.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삶과 분리될 수 없다.

 

신학적 지식보다 경건의 실천을 중요시하는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는 열심을 내는 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적 추구에만 열을 올리는 형식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게을리 한다.

성경보다 신학서적을 더 탐독하고, 성경자체가 말하는 내용보다 신학자들의 주장과 가르침에 더 관심을 가지며, 자기주장의 논거(論據)로 성경보다는 유명한 신학자의 주장이나 신학적 입장을 더 선호한다. 이처럼 단순한 학자의 신앙적인 지성에는 언제나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결함이 존재한다.

물론 이성적인 신학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청교도들이 믿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은혜를 주실 때 먼저 인간 이성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적인 추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필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은 거의 하지 않으면서 신학적 지식을 갖추어 가는 일에만 열심을 내는 편향적인 태도이다. 물론 이런 태도와 대척점에 있는 지성을 도외시하는 신비주의 역시 비판 받아 마땅하다.

교회의 선생으로 신학을 가르친다고 하는 우리들은 어떤가? 가르치고 전하는 일과 관계없이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설교하고 글을 쓰는 일에 힘을 쓰는 만큼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일을 즐거워하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어느 누구보다 교리와 신학적 주제를 잘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이 거룩한 정서로 승화되는 일이 내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실제에 있어서 그 사람은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알지 못하는 자이며 자신이 가르친 교훈의 절반만 아는 자이다.

한 사람이 교리를 잘 이해했는가의 여부는 교리를 얼마나 잘 진술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느냐의 여부로 파악될 수 있다. 교리에 대한 참된 이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며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칼뱅의 제네바교리문답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제1문 “인간의 삶의 중요한 목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다음, 제2문에서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여 세상에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의 삶의 근원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내용은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삶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1. 참된 기독교의 표시는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앞서 헨리 스쿠걸의 진술에서 살펴보았듯이 삶은 신앙으로부터 나온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믿음이 사람 안에서 내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원리로 작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믿음의 사람은 외적인 동기나 압박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며 세상의 유혹이나 협박에 끌려가지 않는다.

달콤한 약속에 현혹되거나 매수되지 않으며 율법의 요구에 억지로 반응하지 않는다. 악하고 죄된 것은 미워하고 옳고 선한 것은 좋아하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신앙과 신앙의 실천은 상호 유기적인 관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헨리 스쿠걸은 이런 원리를 믿음이라는 뿌리에서 나오는 네 개의 가지로 설명하였다. 네 개의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자비, 청결, 겸손’이다. 스쿠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대한 기쁘고 즐거운 깨달음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온 마음으로 하는 순종과 최고의 복을 이끌어낸다고 하였다. 둘째, ‘사람에 대한 자비’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긴 악을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일처럼 분개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셋째, ‘청결’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대한 흥미를 줄이는 어떠한 욕망도 거절하는 내적인 원리라고 하였고, 넷째, ‘겸손’은 충만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깊이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참된 기독교의 표시는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도덕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자의 도덕성이 믿음에 뿌리를 두지 않으면 자기 의를 의지하는 바리새주의가 된다. 이적을 행하는 것이나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병을 고치는 것도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가룟 유다의 경우를 통해 보는 바대로 은사는 은혜 없이 발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늘 조심해야 한다.

지성인의 대명사인 일반대학 교수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잘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교회의 교사인 목사와 신학교 교수는 말씀을 논리적으로 잘 전하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개 현대 교회 교사들은 머리에 있는 내용을 가르치지만, 과거 신앙의 선배들은 내면화된 지식을 가르쳤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보다 자신에게 더 많이 설교하였으며 스스로 수업하고 스스로 꾸짖고 스스로 훈계하였다.

신자는 이러한 경건을 추구해야 한다. 경건은 신학자의 연구의 열매가 아니며 신비주의자의 자기 수고의 결과도 아니다. 엄밀한 지식을 이해하는 마음도 아니다. 경건은 기도로서 하나님의 귀에 소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묵상하는 것이며, 즐거운 찬송을 부르는 것이다. 또한 경건은 위대한 교리들 속으로 들어가는 마음이요 생명의 양식을 먹는 일을 기뻐하는 마음이다.

 

  1.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의 임재 앞에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경건은 거듭난 사람의 심령 안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다. 경건은 신자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신기한 열정이다. 혹자는 ‘신자란 하나님에 취해서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진리의 깃발 편집장을 지낸 모리스 로버츠는 “한 성도에 대한 평가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통함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입맛을 다시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경건과 경건의 실천적인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지런히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의 임재 앞에 나아가야 한다. 이것에 관한 한 최고의 모본은 성자 예수님이다. 성자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본질에 속한 하나님으로 영광과 능력과 권세와 힘에 있어서 등등하다. 그럼에도 성자는 성부께 나아가 기도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는 우리와 달리 고백해야 할 죄가 없으셨고, 구해야 할 세상의 이익들도 전혀 없으셨다. 그럼에도 주님은 성부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기뻐하셨다.

주님은 기도하시기 위해 자주 세상에서 물러가셨으며, 온전한 헌신과 기쁨으로 온 밤을 지새우시며 하늘에 속한 일에 힘쓰셨다.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대중들의 요청과 세상의 흐름에 따른 인기를 거부하셨으며, 제자들의 성공지향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시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의도와 목적에만 전념하셨다. 주님은 경건의 모범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기도 하셨다.

신자는 이런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자신이 가진 신분과 위치가 어떠하든지 기본적으로 우리는 신자다. 신자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묵상하는 일에,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은혜의 수단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 은혜의 수단이 없는 경건은 메마르기 때문이다. 신자는 항상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하며 그런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무엇보다 신자는 신학적인 지식은 물론 하나님을 향한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가져야 한다. 단순한 감정이 아닌 의지를 포함한 사랑의 감정을 가져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감정은 영혼의 방향이라고 하였고, 헨리 스쿠걸은 “사랑은 영혼의 모든 기능과 성향들이 결정되는 강력하고도 주도적인 열정이다”라고 하면서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에게 있어 무엇을 열망하느냐 하는 문제는 너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에 따라 영혼의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당신은 누구를 사랑하며 무엇을 갈망하는가?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자연스럽게 닮게 된다. 친구들과 연인들은 행동뿐만 아니라 목소리와 제스처, 분위기까지 서로 닮는다.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신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를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이 일을 얼마나 소원하는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있는 신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깨끗케 하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될 것이며, 그가 나타나실 때에는 그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는 평생 추구하며 훈련했던 경건의 절정을 보게 될 것이다. 신자인 우리는 이 날을 바라보고 쉬지 않고 경건의 실천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