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범위를 보라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이 자리에서 고생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감격할 줄 알아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우리가 맡을 만하고 해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시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 일을 하도록 기술 습득을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도 아니다.
구원의 관점에서만 보아도, 신자의 인생 자체는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을 때 예수가 오셨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오셨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를 거절했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성화의 관점에서도 어떤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거룩한 문제에 대하여 외인이며, 본성적으로 악을 좋아하며, 하나님께서 부르신 거룩함을 위하여 우리가 얼마나 많이 나를 쳐서 복종시켜야 되는가 하는 과정이 훨씬 근본적이고 중요한 목표가 된다. 그래서 성화라는 말 자체가 거룩해지는 과정이지 거룩해진 것은 아니다.
성화란 거룩하게 되는 과정으로 실수와 실패가 늘 연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듯이 신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신자의 가정이 자녀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며 설사 신앙의 원리를 알고 가르친다 할지라도 그것은 좋은 열매를 맺기 이전에 있는 것들이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어떻게 겸손해지며 주님 앞에 어떻게 무릎을 꿇는가로 우리를 점검하는 것이 언제나 중요하다.
오늘따라 스승 되시는 박윤선 목사님이 그리워진다. 생각해보니 박윤선 목사님의 시대는 기도와 공부가 하나의 윤리이고 신앙이었다. 내세지향적 설교로 하나님 앞에 ‘지사충성’하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시대는 다원주의의 영향 속에서 그 부족한 어떤 인생을 신앙으로 감수하며 살아내는가에 있다. 때로는 알고도 가고 모르고도 가는 것이 많다.
박윤선 목사님의 시대가 있었고, 우리는 우리의 시대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간다. 우리 중에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교역자인 나도 본인에게 아픔이 있으면 자책하며 가게 된다. 내 입장에서 보면 오해로 생긴 일인데도 어디 가서 그 흔한 하소연 한 번 못하고 쓰라린 마음을 평생 가슴에 안고 가야할 때도 있다.
또한 본의 아니게 가족에게 상처를 줄 때도 많다. 사람이 시비를 거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조건과 현실에서 마치 반석에서 물을 내신 것처럼 우리를 끌고 가신다. 우리의 가장 나쁜 조건 속에서 기적을 만들어 내신다.
한국교회에서 박윤선 목사님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누구를 비판하고 정죄한들 그게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재를 뒤집어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는 누가 잘나서, 누가 오해해서 어떤 얘기를 하면 그 말을 받는 수밖에 없다. 아니, 받아줄 수도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살 수 는 없다. 칼빈도 모든 것이 높이 평가되지 않았다.
박윤선 목사님은 그분의 인생이 있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있다. 우리의 가야할 길을 몸소 제시해주셨고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른 막대기를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 시대에 맞게 진솔하게 적용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자기를 확인하지 말고, 그 겸손함으로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묻히고 삼켜서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내가 죽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 권력이 있는 곳에서, 사회공동체 안에서 어떤 기반이 없는 자들이다. 이것이 영광으로 가는 기독교이다.
우리의 어려운 현실을, 주께서 그 사역을 감수하신 것처럼, 이 길을 어쩔 줄 몰라하며 쩔쩔매며 걸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가지고 있는 한심하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도망갈 수 없는 길을 가야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역의 현장을 지켜내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인생의 역할이다.
바울의 사상은 “네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너에게 거룩하고 생명되고 진리가 되는 그 무엇을 줄 것이므로, 어떤 모습으로든지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그 어떤 자리까지 감수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범위 안에서, 비로소 자기 역할을 알게 된다. 우리는 영적인 문제와 거룩한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실력 없음과, 주님께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는 부족한 존재라는 것과, 우리와 우리 자식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매어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부모로서 자식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관해 아무도 이 문제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혹 어떤 아픔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님! 저는 이건 정말 못하겠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제 자녀의 마음을 간섭해 주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여 세상을 이길 힘을 전달하여 주십시오”라며 겸손하게 기도하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일에서 “왜? 어떻게?”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그것들을 허락하고 만드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자리에 끌고 나와서 고생시키는 것에 대하여 감격할 줄 알아야 한다.
“왜 태어나게 해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들었어요? 도대체 이게 뭐에요?”라고 하는 것은 자식이 하는 말 중에 가장 나쁜 말이다.
성경에는 감사한 말, 감격하고 만족하는 말, 알아듣는 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자신의 모든 생애 속에서 경험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희로애락, 절망과 탄식, 갈등과 배신, 감격과 후회, 비탄과 탄성들이 모두 들어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인생과 신앙의 스토리를 겸손함으로 받아 우리의 한 시대를 넉넉히 이기며 걸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