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68)| 선 생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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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생   히브리서 13장 17절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선생과 학생의 충족 조건 각자 자기에게 따져보아야”

 

나는 졸업한 제자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선생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더 정겹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만 해도 학교를 졸업한 후에 불러보는 ‘선생님’이라는 말은 깊은 감회와 정감이 서린 특별한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선생이라는 말에 대한 어감이 많이 달라져서 요즘 학생들에게는 자기를 가르쳤던 분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회상하는 것이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학교 선생님이나 입시학원 선생님이나 다를 바가 없고, 내가 돈 내고 나 배울 것 배우고 끝나면 되는 거래 관계처럼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그러나 곁에 손잡고 함께 있지 않아도, 눈앞에 얼굴 마주 보고 있지 않아도, 그 어른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르침이 되는 선생님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입니다. 그 선생님 생각이 나면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자기성찰이 되고, 그 선생님을 떠올리면 나도 그렇게 살아봐야지 하고 격려가 되는 어른을 우리가 사는 동안 다만 한 두 분이라도 마음에 품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한쪽에서는 요즘 세상에는 존경할만한 스승이 없다고 탄식을 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요즘 세상에는 스승을 존경하는 학생이 없어서 선생하기가 팍팍하고 힘들다고 불평을 합니다. 아마 양쪽 모두의 탓일 것입니다.

 

스승의 날이 되면, 한쪽에서는 선생들이 또 촌지를 받지나 않는가 의심의 눈초리를 치켜뜹니다. 그 비난과 모욕이 싫어 선생들은 아예 학교 문을 닫아버립니다. 혹시 방학중이라 하여도 스승이 날이 되면 모두 학교에 모여 그 날을 함께 보내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학기 중인데도 그날이 되면 선생과 학생이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학교 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를 쉬는 학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정상은 아닙니다. 아니 비극입니다.

 

첫 아이를 낳아놓고 우리 부부가 약속했던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절대로 아이들 앞에서 학교이건 교회이건 아이들의 선생님을 흉보거나 욕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아이들 셋이 다 클 때까지 지켰습니다. 부모가 그렇게 욕하고 무시하고 비난하는 선생님을 아이가 존경하거나 신뢰할 리가 만무하고, 그것은 결국 아이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어느 때는 내가 보아도 정말 선생님답지 않아서 화가 나는 그런 선생님들도 있었습니다. 입 밖에 터져나오려는 선생님에 대한 비난과 증오심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은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나의 아이를 생각해서, 혹시 나의 아이가 나 때문에 선생님을 무시하고 함부로 여기게 될까봐 꾹꾹 참곤 하였습니다. 나의 인격을 위해서도 아니고, 선생님을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나의 아이를 위해서였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나,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는 히브리서의 말씀은 교회뿐 아니라, 교회 밖의 학교에서도 선생과 제자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분명한 것은 선생은 선생의 도리를, 학생은 학생의 도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들은 학생들이 순종하고 복종하는가, 즐거움으로 그들을 인도하도록 하는가를 판단해보고 그들이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는 선생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동시에 학생들은 선생들이 학생들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고 자기들이 학생들의 영혼을 위하여 대신 청산해야 된다는 심정으로 가르치는지 살펴보아서 그렇게 하면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고 또 그들이 즐거움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도록 학생의 도리를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학생은 선생이 선생다운지 따져보고, 선생은 학생이 학생다운지 따져본 다음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때 선생으로서 혹은 학생으로서 할 도리를 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선생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가는 선생이 자기에게 따져봐야 되는 것이고, 학생의 조건을 다하고 있는가는 학생이 자기에게 따져봐야 되는 것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할 바를 제쳐두고 서로 상대방에게 제대로 하라고 따지고 요구하느라 정신을 쏟다가 끝내는 비난과 싸움으로 등을 지고 마는 경우가 많은 것은 커다란 비극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선생과 제자로 한 평생 인연을 맺고 애틋한 정을 나누며 살아간다는 것은 놀라운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