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9)| 투자와 헌신_정창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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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창세기 22:16-18

투자와 헌신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반대급부 바라는 신앙은 헌신이라 할 수 없어”

투자와 헌신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혹은 누군가를 위하여 나를 희생한다는 
점에서 외형은 동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투자와 헌신은 같은 것이 아닙니
다. 반대급부를 전제로 한 희생을 투자라 합니다. 그러나 반대급부에 대한 
전제가 없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헌신이라 합니다. 

헌신과 투자는 근본적으로 달라

되돌려 받을 대가를 전제하지 않고 누군가를 위하여 나를 희생할 수 있는 것
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투자에는 희생에 대한 반대급부가 전제되어 
있고, 헌신에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 대상을 사랑
할 때에만 우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를 위하여 나의 귀한 것을 선뜻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난히 높은 이자를 주는 은행이 있어서 나의 모든 쓸 것을 포기
하며 돈을 마련하고, 심지어 남에
게 빚을 얻어서 까지 그 은행에 돈을 갖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아무도 나를 가리켜 그 은행을 위하여 크
게 헌신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투자를 잘했다고 말합니다. 높은 이자를 받
겠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진 일시적인 나의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절약할 뿐 아니라, 
심지어 식당에 나가서 힘들게 일하여 자식의 학비를 대는 어머니를 가리켜 
투자를 잘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무속신앙에서는 언제나 자기가 받을 대가에 대한 전제가 행동의 원리
가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희생은 신을 감동시켜 나의 원하는 바를 얻어내
기 위한 투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가 되어서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
고 25년이 지나서야 평생의 소원 한 가지를 응답받았습니다. 아들 이삭을 얻
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
을 처음 만나고 45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
르며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찾
아오신 것입니다(창 
22: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확인하고 싶으신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내놓으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아브라함에게 떨어졌
습니다. 숱한 고민과 번민이 있었을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기로 결론을 내리고, 이삭을 데리고 정해진 산으로 가서 손발
을 묶어서 나무 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기 위하여 칼을 
들고 손을 내려쳤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며 그의 손을 멈추게 하셨습니
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서 확인하신 것이 무엇
인지를 두 번씩 반복하며 밝히셨습니다(12, 16절). “너는 네 아들 네 독자
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감
격에 차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16-18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내리신 결론대로 하면 아브라함은 자기의 가
장 귀한 것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
면 그는 헌신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하나
님께 큰 복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복을 받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
다. 
그는 투자를 한 것이 아니고, 헌신을 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헌신을 확
인하시고 그에게 축을 주신 것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
지 않아도 여전히 이삭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헌신의 가장 깊은 바닥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버티고 있는 것입
니다.

헌신의 바탕에 사랑 버티고 있어

우리의 신앙이 무속신앙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하
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행동의 원리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
은 언제나 나를 아끼지 아니하고 드리는 헌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
다. 그런데도 오늘 날 교회 안에 헌신의 간판을 단 투자가 편만하고, 교회 
안에 무속신앙이 판을 친다는 비판을 듣는 것은 부끄러울 뿐 아니라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